다극화로 가는 세계
  • 다극화란 무엇인가 (1) ㅡ ‘주체 전략’ 측면을 중심으로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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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총회  장면.

 

  들어가며 

 

지난 5월 10일 민주노총 본부가 있는 정동 프란체스코 교육관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국내에서 최초로 ‘다극화’ 화두를 전면에 내건 <다극화포럼>(이하 '포럼')이 출범한 것이다.

 

포럼은 출범선언문에서 “일방으로 편향된 한국의 담론지형에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올바로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 공동체의 필요성이 긴박”하다고 제시했다. 오늘날 국내 학계와 언론들이 지나친 미국과 서구 편향으로 인해 이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일반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고, 정치권과 시민단체들 또한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포럼은 스스로 이처럼 세기적인 국제질서의 격변기에 균형 있는 소식 전달과 실천을 겸하는 ‘운동포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무슨 일이든 맨 처음 깃발을 내걸고 앞장선다는 것은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미국 중심의 단일패권 질서가 근래 들어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그 대체 질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다극화’를 선언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그 진보적 의미를 적극 주장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할 때 이처럼 선명한 기치를 내건 사회운동단체가 출현한다는 것은 한국의 진보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본다면 결코 해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날 포럼 창립식에 이어 곧바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발표자와 토론자, 그리고 방청석에 있는 참석자들이 제기한 주장과 질문, 쟁점 등을 종합해 보면 대체로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즉 다극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이다. 전자가  ‘다극화’의 정의(개념 규정)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실제 현실에서 그 실천적 의미를 묻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다극화란 용어가 사람들에게 회자 된 지 오래이지만 정작 그 의미는 아직 불분명하다.  이렇듯 개념이 불분명하기에 그 현실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기는 더욱 곤란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다극화가 무엇인지 그 정의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날 심포지엄의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한신대 이해영 교수(이날 창립총회에서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에 대해 “세계적인 객관적 추세이자, 주체의 전략”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이 정의는 매우 간략하다. 그러면서도 주체와 객관 양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상당히 함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정의에 따를 경우 다극화는 우선 ‘객관적 추세’를 가르킨다.  즉 미국을 대표로 한 집단서방이 근래 들어 정치, 경제, 군사 등 전방면에서 그 힘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으며,  현재 국제질서가 다극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가르킨다. 이 같은 추세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리라고 보며, 다만 그것이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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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극화포럼'  창립 심포지엄 장면


주체의 전략과 관련해서 보자면, 다극화는 그것을 적극 제창하고 있는 남반구 국가들, 특히 그들을 대표하는 국가군이라 할 수 있는 브릭스의 목적 의식적인 지향점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국가는 기존의 미국과 서구 중심의 단일패권적 국제질서가 자신들에게는 매우 불리하다는 판단하에, 민주적이고 공정한 신 국제질서로서의 다극화를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다극화의 정의와 관련한 부분에서 ‘주체의 전략으로서의 다극화’에 초점을 맞추어 이 글을 서술코자 한다.  그를 통해 다극화의 ‘진보성’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현대제국주의 ‘대립물’로서의 다극화

 

오늘날 다극화가 극복하려는 국제질서는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에 기반한 국제질서이다. 그런데 이 같은 단극체제의 본질은 다름 아닌 현대제국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이다. 따라서 먼저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 


국부적이고 지역적인 영향력만 가졌던 구제국주의와는 달리,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는 전 지구적 범위에서 존재하는 '슈퍼 제국주의'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전 지구적인 거대 슈퍼 제국주의의 탄생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며, 특정 역사 발전의 산물이다.


오늘날 ‘단일패권적 제국주의’와 미국 중심의 단극 질서가 나타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이다.  이에 앞서 2차 대전 이후 냉전체제 하에서 존속하였던 것은 ‘동맹적 제국주의’였다. '동맹적 제국주의'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 간의 형식상 평등한 동맹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는 상대적으로 그 주도국인 미국이 이 같은 동맹국 내부의 형식상 평등 관계를 공식적으로 혹은 사실상 부정하는 일방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또 그 내부의 기존 동맹국 간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대외적으로 자신의 단일패권적 세계질서 수립에 대한 의지와 지향을 분명히 한다. 


거기에는 냉전 질서의 해체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우선 냉전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소련과 함께 양대 슈퍼 제국이었던 미국으로선 더 이상 눈치 볼 상대가 없어졌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객관적 요구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사실상 2차 대전 종전 직후보다 경제력에 있어 축소되었음에도 단일패권적 국제질서를 형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같은 요인이 작동하였다. 첫 번째 요인은 비교적 명확하므로, 여기서는 주로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토록 하겠다. 


이 같은 '단일패권적 제국주의'의 출현이 가시화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부터이다. 이 시기는 마침 기존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탈냉전 시대가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미국 중심의 단극적 세계패권을 기초로 한 국제질서의 수립을 지지하던 세력은, 그간 미국 권력집단 내에서 정통적으로 소위 '매파'라고 불리어 왔던 세력과 긴밀한 계보 관계가 있다. 이들이 미국 국내외 외교정책과 전략 결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제1차 이라크전쟁(걸프전)과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사회 격변 이후, 즉 세계 양극 구조가 종식된 이후의 일이다. 이들의 주장은 조지 부시(2001년 취임한 조지워커 부시의 아버지) 정권의 ‘세계 신질서의 건립'이라는 정책구상의 형태로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과 동구 사회의 해체와 그에 더한 미국의 걸프만 전쟁의 예상외의 순조로운 진행으로, 미국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주도하에 세계 신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IT기술을 중심으로 한 '신경제'가 크게 발전하자, 미국의 패권주의적 기세는 더욱 고조되기에 이르렀다. 


클린턴 정부의 '참여와 확장' 외교 전략은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클린턴 정부는 집권 초기 국내적인 경제문제에 치우쳤던 것과는 달리, 집권 후기에 들면서 대외정책에 적극성을 보이는 방향으로 기조를 선회하였다. 그 방식에 있어서는 날로 군사력을 강조하고 간섭주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3년 3월24일 클린턴 정부하의 미국은 유엔의 동의 없이 나토 병력을 동원하여 무려 40여 일간에 걸친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감행하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소위 '주권에 앞선 인권'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직접적인 군사수단을 동원하여 다른 나라의 민족과 종교 문제에 개입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NATO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jpg
NATO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클린턴 정부에 이어 2001년 조지워커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같은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는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방주의'와 '선제공격 전략'으로 대변되는 부시 정권의 국제 전략과 대외정책은 냉전체제 하에서, 그리고 탈냉전 시기 초기만 해도 아직 어느 정도 남아있던 미국의 '다자주의적' 색채를 완전히 벗어던지도록 하였다. 


<신 미국제국주의>의 저자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국의 국제 전략과 대외정책에 있어 항상 다자주의와 일방주의는 혼합되거나 교차하였다. 그러나 2002년 9월 20일(이날은 부시 정권이 <미국 국가안보전략>을 공표한 날이다―주)을 기점으로, 미국 정부는 이전의 지구적 문제에 있어 다자주의를 방기하고 정식적으로 일종의 제국주의 자세를, 즉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기인하면서 신권(神權)정치 색채를 띠는 소위 ‘부시주의'를 취하기 시작했다.”*

 

* [영] 바실리스 포스카스, 빌렌트 게카이 공저: 2005년, <신 미국제국주의>, 세계지식출판사(2006년판), 베이징, pp14-15.

 

이 같은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는 미국의 전통적인 유럽 동맹국가의 언론으로부터도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의 한 기사는 “미국은 다른 나라를 불량국가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 있지만, 그러나 미국 자신이 불량국가의 길에 들어서는 중이다.” 라고 비꼬았다. 

 

그간 미국 정계 요인들의 상관된 발언 및 미국 국내외의 평론들에 근거해 볼 때, 미국의 ‘일방주의'의 의미는 다음 4가지로 개괄될 수 있다. 첫째, 미국의 필요와 미국의 이익만을 고려하며, 다른 국가 내지는 과거 동맹국의 필요와 이익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다. 둘째, 미국은 단독으로 자신의 국제 전략과 목표를 실현할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야 할 필요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동맹국이 미국의 행동에 협조하지 않을 때는 미국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 셋째, 유엔과 다른 국제조직 그리고 국제조약에 더 이상 집착하거나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유엔과 다른 국제조직과 국제조약이 미국의 필요와 이익에 부합되지 않을 때는 그것들을 비켜 갈 수 있다. 넷째, 미국과 패권을 다투거나 대항하는 초강대국 혹은 국가집단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는다.


실제로 부시 정부는 자신의 일방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여러 중요한 국제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 혹은 탈퇴하는 등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예컨대 <생화학무기금지조약>,<핵실험전면금지조약>, 소련과 쌍방 간 체결한 <탄도미사일방위조약>, 그리고 환경보호 방면에 있어 <교토의정서>등의 일방 폐기와 탈퇴가 그 실례이다. 

 

ㅡ '단일패권적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  신자유주의 세계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2차 대전 종식 후 냉전체제가 시작될 무렵의 미국은 지금과 비교할 때 경제와 군사 면에서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예컨대 경제력의 경우, 1950년 미국의 GDP는 2,848억 달러인데 비해, 서구 진영에서 제2위인 영국은 363억 달러로 미국의 12.7%에 불과했다. 프랑스와 서독 또한 각각 288억 달러와 231억 달러에 불과하였다.  같은 해 미국의 공업은 세계 공업 총생산의 42%를 차지하였는데, 제2위인 영국은 겨우 8%, 독일‧프랑스‧일본은 각각 4%, 3%, 2%이었다.   요컨대 국력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요인인 경제력에 있어 미국은 서구의 기타 동맹국과 비교할 때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격차는 오늘날 많이 좁혀졌다. 2008년 세계 GDP총량은 60.7조 달러인데, 그중 미국은 14.3조 달러로 23.6%를 차지하였다. 2013년 이 수치는 각각 74.9조 달러와 16.8조 달러로 미국의 비중은 다시 22.4%로 축소되었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2035년이 되면 미국이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이렇듯 미국과 다른 동맹국 간의 경제력 격차가 날로 줄어들고 있음에도 미국은 어떻게 단일패권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현대제국주의 내부 관계를 '동맹' 관계에서 '단일패권' 관계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상식적으로 볼 때 그 리더 국가인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욱 압도적인 역량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할 수 있다. 우선, 국가 간의 국력 비교 시에 사용하는 통상적인 기준은 슈퍼 패권국가의 총체적 역량의 판단기준으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양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같은 슈퍼 패권국가에 있어 국제적 영향력을 포함한 총체적 힘은 그 경제와 군사의 개별적 지표에 대한 국가 간 단순 비교만을 통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2010년 2월에 발표된 미국방부의 《4년 국방검토보고서》 중에는 자국의 종합적인 역량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자체 평가가 있다. 


"미국은 전 지구적 대국으로서 그 역량과 영향력은 하나의 더욱 광범위한 국제체계(시스템)의 운명과 깊숙이 교차되어 있으며, 이러한 국제체계는 동맹과 협력관계 그리고 과거 60여 년 간 우리가 건설하고 유지해온 다자간 기제로 구성된다."*

 

* Department of Defense Review  Report , Februarv  2010. http :  //www. defense. gov/QDR/images/QDR_ as_ of_ 12 Febl0_ 1000. pdf. 《美国军事―冷战后的战略调整》,p304에서 재인용.
 
이는 현대 슈퍼 패권국가의 역량에 대한 함축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인다. 냉전 시기의 동맹적 제국주의체제 하에서 달러를 중심으로 한 국제통화체계와 군사동맹이 미국의 종합적인 국제적 영향력을 크게 향상시킨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요소들을 고려할 경우 미국은 그간 다른 동맹국과의 격차를 크게 벌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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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기에 탑승할 준비를 하는 미군


다음으로, 미국이 단일패권 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재촉하는  지구화시대의 '시대적 요구'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가 좀 더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경제토대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 요소를 고려할 경우라야 우리는 왜 미국의 일부 경제지표의 상대적 후퇴에도 불구하고 현대제국주의가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로 성격 전환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좀 더 심층적 인식이 가능하다.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그 물질적 기초라 할 수 있는 현대 국제독점자본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와의 관련 속에서 그것을 파악하는 일이 매우 관건적이다. 이는 세계 경제의 일체화와 과학기술 혁명이라는 국제경제 환경의 근본적 변화가 일으키는 국제독점자본의 자본축적 운동 상의 요구와 관련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미시와 거시 양 측면에서 이에 대해 논할 수 있다. 


먼저 미시적 측면 즉 개별 국제독점자본의 축적운동 측면에서 볼 경우, 현대 독점자본은 상품의 생산과 그 실현에 있어 국제 분업과 세계시장에 날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세계 경제의 일체화를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국제적인 정치·군사적 주체를 필요로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 있어 지배적 분파의 지위에 오른 국제독점자본(다국적기업)은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며, 또한 생산과정에 있어선 '지구적 공급체인(사슬)'과 같은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국제 분업을 실행하는 단계에 와 있다. 여기서 수많은 국가와 지역 단위로 나누어진 기존의 파편적 시장들은 세계시장과 세계 자원의 자유로운 활용을 필요로 하는 이들 국제독점자본에게 있어선 애초부터 거치장스런 장애물이다. 특히 과거 케인스주의 시절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복지국가' 모델 하에서 국가의 시장에 대한 무소불위의 간여는 각국에 있어 독특한 시장구조와 자기 완결적인 경제체계를 구축하도록 조장하였다. 이는 새로운 지구화시대의 자본주의에 와서는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우선 이론 면에서 이 역할을 담당한 것이 신자유주의였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지나친 간섭을 비판하면서 국가의 구속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킬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전 지구적 차원의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독점자본의 요구를 이념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각국의 반(半)폐쇄적이고 보호적인 시장의 벽을 허무는데 있어 어느 정도 반(半)강압적 방식이 사용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초기적 생산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국가권력을 동원한 무력과 약탈적 방식을 동원하여 진행되었듯이, 복지국가와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상당 정도 자기 완결적이고 반(反)개방적 경제구조로 굳어져 버린 경제시스템을 다시 개방체계로 바꾸는데 있어선(그것도 단시간 내에), 단순히 WTO를 통한 다자간협상이나 UN기구 내에서의 협력만 가지고서는 한계가 있으며 경제‧외교‧군사적인 총체적 협박과 금융적 기만이 일정 동원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패권국가 미국은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국제독점자본이 요구하는 이 같은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독점자본의 객관적 요구에 비추어 본다면, 진정한 지구 단일시장의 성립을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자본주의 세계정부'의 출현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계시장의 통합 정도는 현 국제독점자본의 생산력 수준과 운동력에 비추어 아직도 상당히 미흡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로선 그 같은 '세계정부'에 가장 가까운 형식이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국제독점자본은 가장 신속히 지역 간 분할 구도와 각국에 잔존 하는 각종 규제와 장벽이 제거될 것을 기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거시적 측면에서 보면 지구화시대의 자본주의 '균형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국제독점자본의 절박한 요구이자 현대제국주의의 성격 변화를 재촉하는 요인이 된다. 원래 자본주의는 그 자체 심각한 불균형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서 이는 매번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근본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독점단계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는 시장 자체의 힘만으로는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힘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종전 후 각국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하는 것을 계기로 국가가 경제에 직접 개입하여 생산과 소비, 산업 제 부문 간, 국내시장과 해외시장 간의 균형과 비례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마찬가지로 전 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의 균형문제가 국제독점자본 운동에 있어 날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와 최근의 코로나19 사태가 불러일으킨 경제위기에서 보듯, 그것은 날로 지구적 범위에서 진행되는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원만한 진행을 방해하고 위기를 장기화시킴으로써 점차 자본주의의 심각한 생존 문제로 변모되고 있다. 통제받지 않는 국제독점자본 간의 무한경쟁은 필연적으로 전 지구적 차원의 공황을 야기하고 국제시장 질서를 교란시킨다. 비록 개별 국제독점자본에 있어 그 조직력‧관리력‧계획성은 그 전의 독점자본에 비해 더한층 발전하였지만, 그러나 지구시장의 방대함과 불가예측성 및 통제 불능적인 요소의 증가에 비추어 본다면 국제독점자본의 이 같은 능력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으며, 이들 간의 맹목적인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은 날로 더해갈 수밖에 없다. 

 

2011년 미국을 휩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png
2011년 미국을 휩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 


이 때문에 이들 개별 자본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생산력과 이를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없는 협소한 세계시장 규모 간의 모순은 더욱 심화하게 된다.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이 같은 지구적 차원의 불균형 문제는 주로 국가 간의 무역 불균형, 예컨대 세계 소비중심의 역할을 하는 미국과 일본‧독일‧중국 등 수출 중심국 간의 무역 불균형의 고착화 등 다소 변형된 형태를 빌려 표출되었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선 이는 세계시장이 이미 심각한 과잉생산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며, 지구적 단일시장 차원으로 진입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무정부성의 발현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무정부성과 과잉생산은 세계화 시대에 들어서면 과거 일국 차원에서보다도 한층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예컨대 현대 국제독점자본의 그 이전 독점자본에 비해 한 층 강화된 생산능력과 자본 규모는 시장의 자동조절 능력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며, 또 여전히 존재하는 각국의 경제 개입과 보호무역 조치는 전 세계 단일시장의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이 때문에 세계화 시대에 자본주의 공황이 일단 발생하면, 그 규모에 있어서나 파괴력에 있어 이전보다 더 심각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적절한 통제 수단이나 구심점이 없기에 위기가 더욱 장기화하고 빈번하게 된다. 이는 결국에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촉진한다. 


 이처럼 케인스주의가 이끌던 전기(前期) 국가독점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가 이끄는 후기 국독자 시기에도 거시적 차원의 '강력한' 균형 기제는 자본주의의 필수적인 생존요건이 된다. 다만 그 범위에 있어서는 일국 차원이 아닌 지구적 차원의 균형 기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며, 이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데 있어 이상적인 형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자본주의 세계정부'라 할 수 있다. 비록 이 같은 통제 주체와 기제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있어 무정부성과 과잉생산 문제는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케인스주의가 그 전성기에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지구적 차원의 통일적인 화폐 및 재정정책 그리고 각국 간의 협력 강제 등을 통해 사전에 그 위기의 폭발을 상당 정도 지연 내지 완화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며, 또 일단 위기가 폭발한 후에는 그것이 통제가 가능한 범위 내에 머물도록 하면서 가급적 조기에 그 수습책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의 요인 이외에도, 오늘날 지구화 경제 시대의 현대 독점자본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사실상 자본주의 세계정부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이전 시기보다 더욱 강력한 제국주의 즉 '단일패권적 제국주의'의 출현을 요구한다. 


(1)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현실사회주의의 위협에 대처할 필요성이다. 
국제 자본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방도가 현재로선 마땅치가 않다. 이전보다도 훨씬 강화된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만이 다시금 부활하고 있는 현실사회주의의 새로운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국제독점자본의 남은 희망이라 할 수 있다. 


(2) 브릭스 등 개발도상국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브라질과 인도 등 브릭스 국가들의 부상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절대적으로 낙후된 국가가 아니다. 이들 중 경제적으로 이미 상당 정도 산업화를 이루었거나 빠른 속도로 이루어가고 있는 국가들이 늘고 있으며, 정치·군사적으로도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거나 심지어는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도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개발도상국들을 서구 선진제국의 경제‧정치적 예속 하에 계속해서 묶어두고, '중심국―주변국'의 관계 범주가 현실에서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국제독점자본의 근본적인 이해에 속한다. 그런데 세계화 시대의 변화된 현실 속에서 이 같은 역할은 사실상 '세계정부'로서 기능할 수 있는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만이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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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미사일부대

 

이상에서 우리는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를 떠받치는 현대제국주의의 성립과 그 필연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든 사물이 그러하듯 제국주의 또한 역사적으로 진화하며, 이에 따라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과거에 존재했던 제국주의와는 다른 시대적 배경과 존재 이유를 지닌다. 오늘날 제국주의는 신자유주의가 추진하는 지구화 시대에 조응하는 제국주의이다. 


그것은 일국적 경계를 허물고 세계 경제의 일체화를 폭력적 방식으로 추진하는 국제적인 정치·군사의 주체이다. 그리고 지구적인 단일시장의 성립에 따라 출현하는 전세계적 차원에서의 무정부적 생산에 대한 일정한 관리와 통제의 필요성 또한 그 존재 이유로 삼는다. 여기에다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현실사회주의 위협에 대한 자본주의 진영의 공동 대처의 필요성, 그리고 나날이 자주성과 원심력을 강화해 가고 있는 광범위한 개발도상국 진영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 덧붙여진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어 ’자본주의 세계정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구적 차원의  상부구조의 필요성은 오늘날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전지구적 차원의 슈퍼 제국주의(단일패권 국가)를 성립시킨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대제국주의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은 이후 ‘다극화’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의 다극화는 일반적 의미의 다극화가 아닌 ‘지구화시대의 다극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극화는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지양’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지양인 것처럼 , 현대제국주의를 부정한 다음 체제는 지구화시대의  경제일체화를 전제로 할 경우  무정부주의적이거나 후퇴적인 것일 수 없고, ‘인류운명공동체’ 개념에 한발 다가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해 성립된 지금의 현대제국주의적 국제질서의 규범체계보다 진일보 진보적인 것이라야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현재의 다극화 세력은 ‘민주, 공정’과 같은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고, 유엔 등 다자간 협의체를 옹호하면서 패권과 독점을 부정한다.  그간 브릭스의 성명이나 일대일로의 이념에서 보듯 세계화의 추진에 있어서도  평등, 호혜, 자주성에 입각한 국제분업과 교류를 천명한다.


이러할 진대, 다극화는 현대제국주의가 주도하는 기존 국제질서에 대한 '부정'이다.  다극화가 신자유주의적 상부구조(단일패권 국가)를 부정한다고 해서  ’무정부성‘을 지향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며, 또 그것이 이미 성립한 세계 단일시장을 해체하고 다시 과거의 국민경제 시대로의 복귀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구적 단일시장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차원의 국제질서 원리를 제시할 가능성을 지니며, 이러한 측면에서  다극화는 현 국제질서에 대한 단순 부정이 아닌 지양(止揚)의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다극화가 현대제국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대립물‘ 이자 '지양'인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다극화의 진보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관건적이다. 


이하에서 다극화의 진보성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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