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극화로 가는 세계
  • 다극화란 무엇인가 (2) ㅡ ‘주체 전략’ 측면을 중심으로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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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극화의 진보성

 

1)   민주성 

 

 지금 시기의 다극화는 역사상 몇 차례 출현했던 과거의 다극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다극화는 먼저 그 추진 주체 면에서  크게 다르다. 과거의 다극화가 지역적 혹은 세계적 패권을 다투는 소수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지금 시기 다극화는 주로 개발도상국에 속한 신흥 국가들이 대거 부상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세계 역사를 보면, 국제질서의 다극화는 과거 이미 몇 차례 존재한 적이 있다. 가깝게는 19세기 후반~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존재했던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의 5강 체제가 그것이며, 또 조금 멀리는 나폴레옹전쟁 직후 영국‧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의 5강 체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다극 체제는 모두 소수 강대국이 지역 내지는 세계적 차원에서 '세력균형'을 통해 기존의 '세력 분할'을 지키기 위해서 형성한 것들이었다. 이 때문에 국제관계에 있어 볼 때 이는 소수집단의 독점적 특권의 성립에 기여하는 의미를 지녔다.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들이 유럽 지도를 재구성하기 위해 비엔나 회의를 열었다.png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들이 유럽 지도를 재구성하기 위한  빈회의를 열어 '5강 체제'를  구축했다


당대의 다극화, 즉 냉전 종식과 함께 새롭게 형성되는 지금의 다극화는 그 성격에 있어 완전히 다르다. 냉전 시기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그동안 뒷전에 밀려나 있던 '경제문제'가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 각국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그간 가려져 왔던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 역시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부상하였다. 이리하여 ‘남북문제’는 이제 과거 냉전 시기 동서 간 이데올로기 대립을 대체하는 국제사회의 중심 이슈가 되었다. 


현재의 다극화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추진되는 것임을 우리는 우선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개발도상국 진영에 속한 신흥공업국들이 속속 부상함으로써, 북부 국가(서구 선진자본주의 진영)의 세계 정치·경제 영역에서의 독점 체제를 뒤흔들면서 전반적으로 남북 간 힘의 균형이 재조정되는 양상이다. 


개발도상국 진영은 현재 지구상의 광범위한 국가군과 지역을 포괄한다.  소련과 동구권 변동 전에 전 세계에는 약 191개 국가와 지역이 있었는데, 그중 개발도상국은 약 163개 정도였다. 소련과 동구권의 해체에 따라 소위 ‘전환국가'인 동구권 국가 대부분은 기존의 제2세계에서 제3세계 (즉 개발도상국가)로 하향 이동하였다. 그 결과 개발도상국은 180개 정도로 증가하였으며, 인구와 토지 면적에 있어서는 각기 4억 명과 2,500만 제곱킬로미터가 더 증가하게 되었다. 
 
이렇듯 개발도상국은 그 국가 수와 인구 및 토지 면적 등에 있어 모두 절대적 비중을 갖고 있음에도, 그간 국제사회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지위와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소외당해 왔다. 이 때문에 소수의 서구 선진국이 주도하고 그들에게만 유리한 국제질서가 아니라, 이들 광범위한 다수 국가가 적극 참여하고 또 이들의 이해가 반영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렇듯 다수 국가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다극화는 민주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표면상으로 브릭스가 G7(집단서방)에 맞서 다극화를 추진하는 선봉에 서 있다. 여기서 브릭스와 전체 개발도상국 진영과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세계 정치와 경제에 있어 브릭스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브릭스의 GDP 비중은 2023년 회원국 확대 이후 구매력 기준으로 대략  전세계  GDP총량의 약 36%를 차지하며, 또 이들의 세계 경제 성장에 대한 공헌도는  30%를 넘어선다. 여기에 전 세계 영토 면적의 31%, 세계 총인구의 45%인 점까지를 감안하면 브릭스가 오늘날 국제무대에 있어 상당한 대표성과 영향력을 가진 하나의 '극'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기존 브릭스 5개국 중 남아공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머지 4개국(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은 각기 단독적으로도 다극화 체제의 한 '극'을 형성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개별국가로서가 아닌 '브릭스'라는 집단적 측면을  강조하는 까닭은, 이들이 ’브릭스‘라는 형식을  빌려 앞으로 구축될 신 국제질서 건설을 위한 보조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동전선의 형성은 브릭스 내부 성원 간의 동질성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모두 서구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분업체계 속에서 주로 원료와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로서 역할 하며 불리한 위치에 처해왔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IMF-세계은행으로 대변되는 현 국제통화체계 속에서 주기적으로 외환위기와 채무 위기 등의 금융 불안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평소 충분한 외환 비축을 쌓기 위해 수출주도형 경제를 유지해야만 하였고, 이를 위해 자국의 환경파괴와 자원 낭비를 대가로 선진국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야 했다. 

이처럼 과거 냉전체제 하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낡은 국제질서와 국제 분업으로부터 불공정한 대우와 억압을 받고 있기에,  브릭스는 자신들이 앞으로 지속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같은 불리한 체제를 반드시 개혁해야만 한다는 데 공감한다.  브릭스 국가들은 이처럼 개발도상국 진영에 속한 대부분 국가의 보편적인 상황을 공유하면서, 그들 스스로도 이를 잘 의식하고 있기에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개발도상국으로 규정한다. 이로부터 그들이 추구하는 신 국제질서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국제질서에 있어 독점과 패권을 부정하고 민주와 공정, 호혜 원칙을  표방할 수밖에 없다.  

 

11개국으로 회원국 확대를 결정한 요하네스버그 제15차 브릭스 정상회의(2023.8).png.jpg
요하네스버그 제15차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회원국을 11개국으로 확대키로 결정했다(2023.08) 

 

 물론 이들 간에 상호 대립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 인도 간의 국경문제 및 지역정치를 둘러싼 상호견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브릭스 내부의 공통이익에 비하면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국제통화체제 개혁을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브릭스'의 역사적 의미는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미국패권이 무너지고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국제질서의 새로운 변화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브릭스 내지는 개발도상국 상호간의 그 어떤 지역적 대립과 모순보다도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물론 어느 측면이 더욱 이들 상호 간의 관계를 주도할 것인가는 상당부분 앞으로의 투쟁 (상호간의,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이들 내부를 분열시키려는 현대제국주의 세력과의)과 주체의 노력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지만, 이 또한 커다란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개발도상국 진영의 강력한 부상 하에 추동되고 있는 현 다극화의 민주성과 진보성은 이들이 공식 요구하는 ‘새로운 민주적 국제질서’ 수립과 관련한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5월10일 중국의 국가주석 장쩌민은 아시아개발은행 이사회 제35차 연례회의에서 '국제관계의 민주화'에 대해 발언하면서, "국제관계의 민주화는 바로 각국의 일은 각국 인민이 주인이 되며, 국제적인 일은 각국이 평등한 협상을 통해 처리하고, 전 세계적인 도전에 대해 각국은 협력해서 대처한다.”라고 천명했다.  2009년 6월16일 브릭스 4개국 제1차 정상회담 후 발표한 <브릭스정상 에카테리나회의 공동성명>은 국제금융기구의 개혁 추진, 개발도상국의 발언권 제고, 국제무역과 투자환경의 개선 등을 주장하면서 이것들을 향후 브릭스의 주요한 사업방향으로 설정하였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도 브릭스 국가들이 추진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다. 


다극화에 기반 한 새로운 민주적 국제질서 개념에 대해 좀 더 포괄적이고 전면적 규정을 한 공식 외교문서로는, 현재 브릭스를 이끄는 양대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 정상이 일찍이 1997년에 공식 발표한 합의문인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의 세계 다극화와 신 국제질서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이 있다. 조금 길긴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신 국제질서'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 내용을 아래에 인용한다.

 
― 쌍방은 상호 주권과 영토 완전성, 상호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호혜 평등, 평화공존 및 기타 공인된 국제법 원칙이 마땅히 국가 간 관계를 처리하는 기본 준칙이자 국제 신질서 수립의 기초임을 주장한다. 각국은 본국의 상황에 근거해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그 발전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타국은 이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제도, 이데올로기, 가치관의 차이는 마땅히 정상적인 국가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장애가 되지 말아야 한다. 각국은 그 대소와 강약 그리고 빈부를 불문하고 모두 국제사회의 평등한 성원이며, 어떠한 국가라도 패권을 도모하거나 강권 정치를 추진하며 국제사무를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경제 관계에 있어 차별정책을 배제하며, 호혜 평등의 기초위에서 경제무역과 과학기술 및 인적‧문화적 교류와 협력을 강화 확대하며, 공동 발전과 번영을 촉진한다. 

 

―쌍방은 새로운 보편적 의미의 안보관을 확립할 것을 주장하며, 필히 ‘냉전적 사고방식'을 포기할 것과 집단정치를 반대하며, 평화적 방식으로 국가 간 의견차이나 분쟁을 해결하며, 무력에 호소하거나 혹은 무력으로써 상호 위협하지 않고 대화와 협상으로 상호 이해와 신임을 구축할 것을 촉진하며, 쌍무 및 다자 간 협조와 협력을 통해 평화와 안전을 추구한다. 쌍방은 군축의 진전이 촉진되기를 원하며, 전면적인 핵실험 금지조약에 서명하고 핵무기 비확산조약 집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쌍방은 군사 집단을 확대하고 강화하려는 기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왜냐하면 이 같은 추세는 특정 국가의 안전에 위협이 되고 지역과 전 세계적 긴장 상태를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쌍방은 유엔과 안보리의 역할을 응당 강화해야 한다고 보며, 유엔의 세계평화 옹호와 안보 방면에 있어서 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긍정하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유엔은 주권 국가로 구성된 가장 보편적이고 권위 있는 조직이며, 그 국제무대에 있어서 지위와 역할은 다른 어떠한 국제조직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고 간주한다. 그것은 '국제 신질서'를 건립하고 옹호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 유엔의 평화유지를 위한 노력의 중점은 마땅히 충돌의 발생과 만연의 방지에 두어져야 한다. 평화유지 행동은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의거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필히 당사국의 동의를 구해야 하고 또 엄격하게 안보리의 권한 부여와 그 감독하에서만 실시하여야 한다. 


— 쌍방은 광범위한 개발도상국과 비동맹운동은 세계의 다극화를 추진하며 '국제 신질서'를 건립하는 중요한 역량임을 강조한다. 개발도상국의 단결은 자조 의식을 강화하며, 국제정치에 있어 역할을 증대시키고 세계 경제에 있어 비중을 강화하며, 그 부상은 국제 신질서 건설의 역사적 진척을 힘 있게 추동한다. 그들은 응당 미래의 국제 신질서에 있어 자신의 마땅한 지위를 차지해야 하며, 평등하고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국제 업무에 참여하여야 한다.  ( 인민일보, 1997년4월24일 게재.  굵은 글씨 강조는 인용자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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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

 

이상의 성명은 우리가 지금까지 접할 수 있는 다극화에 기초한 국제 신질서의 내용과 관련된 가장 완성되고 권위 있는 초기의 공식 국제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중국과 러시아 양국의 세계 다극화에 대한 기본 인식과 주장이 잘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있어 개발도상국의 보편적 요구와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렇듯 현시기 다극화는 그 성격에 있어 제국주의 패권 질서의 '대립물'로서의 분명한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국제질서에 있어 '독점'과 '패권'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이 때문에 궁극적으로 다극화는 현대제국주의의 종식에 기여한다. 


다극화에 대한 이러한 성격 규정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 패권주의 단극체제를 부정하는 주요 역량(주체)이 다름 아닌 그 일차적 피해자인 개발도상국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점이야말로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다극화와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과거의 다극화는 모두 소수 강대국의 지역 혹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세력 분할을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국제질서에 있어 '독점'의 폐지가 아니라, 그것의 존속 내지는 다른 독점 형식으로의 대체를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소수 강대국이 각축하던 과거와 같은 다극 체제로의 복귀만 가지고서는 결코 오늘날 현대제국주의의 대립물이 될 수 없다. 오직 민주와 공정, 호혜 평등과 평화공존에 입각한 새로운 차원의 다극화만이 그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여기서 '낡은 다극화'인가 혹은 새로운 '진보적 다극화' 인가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 그 추진 주체가 누구인지가  관건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개발도상국 진영 외에도, 현재의 다극화를 추진하는 세력에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서구 선진자본주의국가 역시 그 주체의 하나로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와 일본 등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들의 경우, 이들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이들은 과거 자신들을 이념적으로 굳게 결속시켰던 냉전체제의 종식과 그리고 세계화가 급속히 전개되는 새로운 정세 속에서, 한편에선 경제와 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의 패권주의에 저항하고 경쟁하는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이들은 '국제독점자본'으로서의 이해를 공유한다. 왜냐하면 이들 국가 내에서 국제독점자본은 마찬가지로 통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자본분파를 대표하는 주도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국제독점자본'의 공통 이해에 입각해 볼 때 현재 미국이 주도하는 지구적 통일시장의 수립은, 설령 그것이 패권주의적 방식이라 할지라도 자신들과 완전한 적대적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이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타협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갖고 있다. 이 같은 자신들의 이중성 때문에 이들은 미국의 패권 역량이 매우 강할 때는 그 하위동반자의 지위를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나 세계의 다극화 추세가 더욱 강화된다면 이들도 미국의 영향권 하에서 벗어나서 당연히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쟁 세력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며, 다극화를 지지하고 강화시키는 요소로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의 성립과 유로의 탄생, 그리고 최근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개발도상국들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및  일대일로 사업에  그 일부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그 같은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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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그러나 이들은 어쨌든 현시점에선 미국의 단일패권에 대항하는 다극화의 핵심 세력이 될 수 없다. 현대제국주의를 부정하는 대립물은 그것을 구성하는 내부의 동맹국에서 찾아지기보다는, 그 외부 요소인 개발도상국 진영에서 찾아지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유럽연합과 일본은 미국이 이끄는 단극체제 하에서 하위 파트너 또는 다극화의 추종적 요소는 될 수 있어도,  단극체제를 부정하는 다극화의 결정적 역량은 되지 못한다.


다극화의 민주성과 관련하여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개발도상국 진영의 부상을 주요 추동력으로 삼아 진행 중인 지금의 다극화에 있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역할은 매우 각별하다. 중국은 사실상 브릭스 가운데서도 그 핵심역량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브릭스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제를 갖고 있으며, 또한 가장 빠른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또 브릭스 내부 상호 간의 경제 관계에서도 중국은 그 중심적 위치에 있다. 사실상 이들 국가군 전체의 빠른 경제성장은 상당 부분 중국의 경제발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 이와 관련하여, 스탠더드은행의 2013년 보고서는 브릭스국가 간의 긴밀한 경제무역 연계의 실태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는 "2012년 중국과 인도 그리고 브라질 절반 이상의 수출과 남아프리카공화국 48%의 수출은 모두 신흥시장을 목적지로 하며, 브릭스 5개국 간의 무역액은 3100억 달러에 이르러 2002년 280억 달러의 11배 이상이다. 브릭스국가 간 자국화폐에 의한 결산 협정, 남남합작은행(브릭스은행) 등 항목의 합의 및 실시에 따라 중국은 남남 경제무역협력의 주축 국가가 되고 있으며, 지구적인 경제 질서의 중심이 신흥국가집단으로 이전하는 추세는 이미 되돌릴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金砖国家研究》(第一辑),p9에서 인용.)
 
이 때문에 '개발도상국 진영이 추동하는 다극화'라는 표현은 '개발도상국과 사회주의 국가 간의 연합에 의해 추동되는 다극화'라는 표현으로 바뀌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국제사회 위상과 관련하여 'G2' 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현 국제정세가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세계 패권 쟁탈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중국 역시 현재 미국의 자리를 노리는 새로운 패권국가에 지나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이 같은 관점은 객관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현 시기 국제정세 인식 상의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중국은 이 같은 주변의 시각을 의식해 'G2'라는 개념 사용에 대해 그간 거부감을 표시해 왔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개발도상국 진영의 일원임을 국제사회를 향해 환기시키고 있다.

 

* 이는 중국 역대 지도자들의 그간 언행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그중 개혁개방의 설계사인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국제정치에 있어 중국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주요하게는 두 마디이다. 하나는 패권주의에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옹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은 제3세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현재 제3세계에 속하며, 장래에 발전하여 부강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제3세계에 속할 것이다. 중국과 제3세계국가의 운명은 공통적이다.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남을 괴롭히지 않고, 또 영원히 제3세계 편에 설 것이다."(《등소평 문선》第3卷,p56. ) 실제로 중국은 그간 줄곧 제3세계국가의 국제적 혹은 지역적 조직들과의 협력 강화에 힘을 기울여 왔다. 중국은 지금도 비동맹운동의 관찰국가이며, 개발도상국으로 구성된 '77개국 집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또 중국은 자신이 2001년 개발도상국의 신분으로 WTO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간의 실제 역사적 행보를 보면 우리는 중국이 개발도상국 진영 내에서도 가장 일관되고 철저하게 반독점과 반패권주의 입장을 분명히 해 온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듯,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서 무조건 반(反)패권주의와 반독점 세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사회주의 국가가 만약 자본주의 열강처럼 스스로 패권국가의 길을 걷는다면, 과거 소련처럼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 같은 방식으로는 자본주의국가들이 절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소수'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또 이 때문에 오히려 현대제국주의로 하여금  '신냉전'과 같은 국제적 차원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다시 기도하고, 이를 통해 대 사회주의권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좋은 구실을 제공할 뿐이다.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세계 자본주의국가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기 발전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체 자본주의 진영 단결의 '핵심'인 현대제국주의를 무력화시켜야만 한다. 그 관건은 다름 아닌 후자가 주도하는 패권적 국제질서를 '민주적'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즉 앞서 중·러 양국 정상 간의 <성명>에서도 천명하였듯이, 각국이 사회제도와 이데올로기 및 가치관의 차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발전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신 국제질서가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시기 현대제국주의의 가장 큰 경계와 집중 견제 대상인 사회주의 중국은, 자신의 생존 전략을 위해서도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과 신 국제질서 수립에서 그 한 가운데에 설 수밖에 없다. 또 실제로 그간 중국은 일관되게 국제질서에 있어 일체의 '독점'과 '패권'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표방해왔다. 중국의 이러한 일관된 태도는 객관적으로 볼 때 현대제국주의의 존재로 피해를 입고 있는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중국은, 개발도상국 진영과의 연대를 통해 현대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광범위한 이들 국가를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비로소 그 자신 또한 미국과 서구 금융자본의 견제와 봉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자기 발전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다음의 한 중국 대학교과서에서도 그 같은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광범위한 개발도상국은 패권주의와 강권 정치에 반대하고 세계평화와 발전을 추진하는 기본역량이며, 공정하고 합리적인 국제신질서를 수립을 추동하는 주력군이다. 광범위한 개발도상국과와 우호협력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중국의 전방위 외교의 근본적인 구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중국이 자신의 국제적 지위를 드높이는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국제관계학》,p480. 인용문중 고딕체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임.)
 
다른 한편, 중국은 자신이 천명한 '평화적 굴기(和平崛起)’를 추구할 수 있는 내적 조건 또한 지니고 있다. 14억에 달하는 인구에 의해 뒷받침되는 국내시장의 거대한 잠재력 외에도, 그 경제 제도에 있어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유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함에 따라 제국주의나 패권주의 국가의 길을 추구하지 않고서도 내생적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여력이 충분하다. 이러한 중국의 사회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당대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매우 긴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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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화하는  중국경제

 

2 ) 공정성

 

개도국 진영을 대표하는 브릭스는 '공정한' 신 국제질서 수립을 요구한다. 여기서 이들이 주장하는 ‘공정성’의 핵심 내용은 ‘역량에 비례’한 권한의 부여이다.  신흥개도국이 그간의 발전을 통해  국제 역량 관계를 크게 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서방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과거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공정성’에 대한 지향은 정치적으로는 안보리 이사회 개혁을 통한 유엔의 역할 강화 요구로, 경제적으로는  IMF와 같은 국제통화기구 개혁에 대한 요구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브릭스 주요 회의나  정상 간 공동성명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예컨대 지난해 브릭스 15차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브릭스 지도자들은 "우리는 유엔을 보다 민주적이고, 대표적이며,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며, 안보리 회원국에서 개발도상국의 대표성을 높여 현재 세계적인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안보리를 포함한 포괄적인 개혁을 지지한다"라고 천명했다.  또  브릭스 그룹 내부의 금융결제 방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BRICS와 그 무역상대국 간의 국제무역과 금융 거래에서 현지 통화 사용을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재의 달러패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여기서 국제통화제도의 개혁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극체제, 즉 단일패권적 현대제국주의 국제질서의 핵심이 달러패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권화폐’에 불과한 달러가 세계화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존 국제질서가 갖고 있는 ‘불공정성’의 핵심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세계화폐인 주권화폐는 사실상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하면서도, 그 발권 국가인 미국에게 세계 자원을 약탈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이 때문에 브릭스는  그동안 국제질서 개혁의 초점을  국제통화체제 개혁에 맞추어 왔다. 

현대제국주의는 구제국주의와는 달리  직접적 영토지배가 아닌  '국제규범’에 입각한 간접적 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현대제국주의의 두 형태 즉 '동맹적 제국주의'와 '단일패권적 제국주의'에 있어 세계화폐가 갖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에 있어 세계화폐는 1944년 7월 체결된 ‘브레튼우즈협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은 본래 국제무역의 원활한 진척을 위한 단순 결재수단의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1971년 닉슨 대통령의 '달러 불태환 선언' 을 기점으로 세계화폐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때부터 세계화폐는 전 지구적 자원에 대한 '무상사용권'의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로써 진정한 초 패권국가 출현을 위한 강력한 수단이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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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발표하는  닉슨 대통령


 국제사회에서 이처럼 '신용화폐화 한 세계화폐' 즉 금 태환 의무에서 완전히 벗어난 세계화폐의 발권력을 어느 특정 국가가 독점하게 되면, 그 나라는 전 지구적 자원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 같은 권력을 기초로 먼저 자국 내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지속적인 복지정책의 수행에 있어 가장 고질적 문제인 '복지기금' 부족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이로부터 국내의 사회 정치적 안정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 구축에 필수적인 과학기술 발전에 소요 되는 막대한 자금을 별반 힘 안들이고 동원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초 패권국가 성립에 있어 필수적인 사회 정치적, 경제적 조건이다. 

현대제국주의가 규범과 규칙에  의거한 국제 통치체계를 구축함에 있어,  이미 지구적 통일시장이 출현한 조건에서 모든 교환관계를 매개할 수 있는 수단인 '화폐'를 그 제도적 근간으로 삼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화폐권력은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패권 수단이 된다. 또한 현대제국주의에 필요한 전 지구적인 군사력 배치 및  운영 그리고 군사기술 상의 지속적인 우위 확보는, ‘세계화폐’라는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만약 화폐권력이 흔들릴 경우 오늘날 미국과 같은  초 패권국가는 그 막대한 비용 때문에 머지 않아  패권적 지위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이 점차 '국제 생산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면서도 경제가 저물가와 고성장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달러패권이 존재한다. 이는 미국이 연속적으로 대외전쟁을 일으키면서도 경제가 붕괴하지 않은 원인이자, 또 월남전의 위기에서 벗어나 신속하게 독일과 일본의 초월 위협을 제거하고, 나아가 소련을 무너뜨리고 단극 패권을 세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슈퍼 패권국가에 있어 화폐권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를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제국주의는 달러패권의 종결과 함께 종식되며 양자는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화폐권력은 이처럼 지구화시대의 '단일패권적 제국주의'의 가장 핵심적 권력이다. 


일찍이 레닌은 금융자본에 의한 통치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이고, 금융자본은 일종의 '일체의 경제관계와 일체의 국제관계 가운데서 거대한 역량이자 결정적 작용을 하는 역량' 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 화폐권력을 통해서 우리는 금융자본의 이 같은 진수를 유감없이 확인하게 된다. 세계화폐에 기초한 현대제국주의는 제국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이자 그 최종 형태라 부를 수 있다. 슈퍼 패권국가인 미국에 있어 달러패권의 중요성은 다음 인용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주권국가가 형성된 이래, 그 어떤 국가도 세계 다른 나라를 희생하는 대가로 장기간 이득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71년 이래(닉슨 대통령이 달러 불태환을 선언한 해-주)로 지구상 유일하게 슈퍼대국인 미국은 날로 형성되는 자신의 달러패권에 기대어, 상호의존도가 깊어지는 국제사회에서 세계경제로 하여금 미국경제에 복종케 만들었으며, 세계 각국이 자신에게 변형된 형태의 ‘조공'을 바치는 제국(帝國)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전통적인 주권국가로 구성된 세계에서, 군사적으로 야심 있는 국가들은 하나 같이 채무국이면서 높은 세율과 고비용의 경제체제로 변모하여, 최후에는 스스로 유지하기 힘들게 되어 결국 전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이 이끌었던 프랑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영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전후한 독일 등이 그러하였으며, 모두 예외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상 유일한 슈퍼대국인 미국만이 이미 가볍게 4차례의 국부적 전쟁을 치른 후, 다시 한 차례 이란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전통적인 주권국가로 구성된 세계에서 각국은 앞다투어 경쟁적으로 수출을 시도한다. 이로부터 진정한 재화인 황금 혹은 기타 경화(硬貨)를 획득해 자국 생산을 확대하려 한다. 그 어떤 나라도 장기간 무역적자를 유지하길 원하지 않고, 또 그렇게 할 능력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슈퍼대국인 미국만이 수십 년을 하루같이 수입이 수출보다 큰 상황(무역적자)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무역은 미국이 지폐 달러를 발행하고, 다른 나라들은 이 달러로 구매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놀이(게임)'로 변모되었다. 이리하여 지구상 최대의 무역적자 국가인 미국은 경제의 고도한 번영과 지구적 패권을 누리는 반면, 지구상의 수많은 무역 흑자국은 ‘수출 조공국가'로 전락하여 국내의 빈곤과 자본 부족 사태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전통적인 주권국가로 구성된 세계에서 채무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세계 권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자국정책과 중앙은행이 금융정책을 제정할 수 있는 자주권마저 상실한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상 최대의 채무국인 미국은 여전히 지구상 유일한 슈퍼대국이다. 채권국들은 오히려 날로 자국의 국내 정책과 중앙은행의 금융정책을 제정할 수 있는 자주권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처럼 달러패권은 이미 완전하고 철저하게 세계를 거꾸로 뒤집어 버렸다.” (《미국 달러패권과 경제위기(美元霸权与经济危机)》,pp52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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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필자는 위에서 현대제국주의가 ‘규범(규칙)에 입각한 통치'를 특징으로 삼는다고 언급하였다. 지금 그 규범체계의 핵심이 다름 아닌 ‘달러패권’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현 국제통화질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규범(규칙)을 바꾸면 현대제국주의는 곧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요구하고 있는 집단이 다름 아닌 브릭스이다. 따라서 브릭스로 대표되는 다극화 세력은 사실상 현대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종식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또 다른 주권화폐(일국화폐)를 통해서 달러패권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국제화폐의 채택을 통해 왜곡된 지금의 국제통화체계를 바로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패권적 규범을 다시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며,  현 세계화폐에 기초한 현대제국주의의 종식과 진정한 다자간 체제의 수립을 바라고 있다. 


이것이 다극화가 본질적으로 반제국주의 성격을 갖는 이유이다. 진정한 세계화폐가 출현하면 더 이상 현대제국주의 국제질서는 존립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지구화시대에 있어 현대제국주의는 '단일패권'을 의미하며, 따라서  단일패권은 곧 ‘주권화폐의 세계화폐화’와 동일한 개념이다.


이처럼  다극화세력이 요구하는 ‘공정성’ 규범은 가장 직접적으로 달러패권의 부정을 겨냥한다.  따라서 그것은  곧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이자, 가장 보편적 의미에서의 ‘독점’ 일반에 대한 부정이다.

 

3) 새로운 차원의 ‘세계화’ 추진에 기여

 

끝으로,   ‘세계화’와의 관련 속에서 다극화의 진보성에 대해  잠깐 논하도록 하자. 


어떠한 국제질서이든 그것이 진정으로 ‘진보적’ 성격을 갖기 위해선, 즉 궁극적으로 인류해방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생산력 발전에 공헌할 수 있어야 한다. 맑스는 일찍이 ‘생산력 발전’이야말로 인류 역사 발전에 있어 가장 강력한 ‘기관차’라고 표현한 바 있다. 


맑스는 자신의 저서인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인류가 해방되는 사회의 물질적 전제조건과 관련하여, 생산력의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적 전제조건”이라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생산력의 세계적 발전과 함께 비로소 인간의 보편적 교류가 확립되고……지역적으로 국한된 개개인들을 세계사적이며, 동시에 경험적으로도 보편적인 개인들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오늘날의 언어로 바꾼다면, 더 높은 차원의 세계화(즉 ‘보편적 교류’)가 인류해방 사회의 구현을 위한 필요 조건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도 다극화가 세계화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여부는 그 진보성을 판단하는데 있어 빠트릴 수 없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개발도상국이 주축이 되는 다극화는 경제 일체화와 전반적인 세계화의 발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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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본격화한 세계화 과정은 그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이 주도해 왔고, 개발도상국들은 줄곧 피동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2000년대 들면서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 국가들의 발전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유럽·일본 등 서구 선진국들은 경제침체와 금융위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 국가들은 객관적으로 보면 서구 주도의 초기 세계화 과정의 수혜국들이다. 이들 국가는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자국 경제의 산업화를 달성하고 사회발전을 앞당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들 국가는 자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화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은 점차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이후 다자간 국제무역 협상에 임하는 태도이다. 최근 WTO 협상에서 서구 선진국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불평을 자주 털어놓는데,  그 요지는 그간 신흥공업국들이 과거 수십 년간 세계화와 선진시장 개방에 따른 혜택은 충분히 향유 하면서도, 세계 무역체계에 있어 상응한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소위 '공평 무역'과 '대등한 개방' 시행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 자신들의 다자간 체제에 대한 주도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됨에 따라 이들은 소위 '순서 있는 협상(quential negotiation)' 모델을 채택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즉 먼저 지역과 쌍무 차원에서 개별 협상을 진행하여 높은 수준의 FTA 본보기를 만든 다음, 이것을 근거로 다른 개발도상국들도 이 같은 협상 내용에 따르도록 강제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서구 선진국들이 애초 자신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전 지구적 다자간 무역체제(WTO)를 스스로 배척하고 있으며,  다자간에서 지역 내지 쌍무 간으로 후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최근 들어 미국의 트럼프와 바이든 정부는 중국을 겨냥한 디커플링(탈동조화) 내지는 디스리스킹(탈위험)을 들먹이면서 노골적으로 주변국들에 대해 편 가르기를 강요하고 있다. 이 같은 편 가르기와 벽 쌓기는 분명 집단서방이 그동안 추진해온 급진적 세계 단일시장 구축 전략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브릭스와 개발도상국들은  오히려 각종 국제회의나 주요 정상회담을 통해 WTO 체계의 복원과 공정한 자유무역 질서의 구축을 지지하고 나섰다. 얼마 전 브릭스를 이끄는 두 나라인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회담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서도 그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 투명하고 비차별적인 다자간 무역 시스템의 발전을 강조한다. 
러-중 양국은 WTO 범위 내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고, 기구(WTO) 개혁을 촉진하고, 분쟁 해결 메커니즘의 정상적인 작동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포함하여, 제13차 WTO 장관 회의의 결과를 이행하기 위한 노력을 지원할 것이다. 
러-중 양국은 세계무역의 분열, 보호주의의 성장 및 불공정 경쟁을 유발하는 다자간 무역, 금융, 에너지 및 교통, 운송 기관의 활동을 포함하여 국제경제 관계의 정치화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러 정상 공동 성명. 2024.05.16~17) (인용문 중 굵은 글씨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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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러 정상회담((2024.5.16.)

 

또 중국이 2013년 처음 제창하고, 전세계 152개 국가 및 32개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는 ‘일대일로’ 공동사업은 브릭스 주도의 야심 찬 세계화 사업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천명하는 이념 및 실제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개방성, 포용성, 평등과 호혜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 집단서방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서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세계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한다. ( 관련 내용은 <울산함성> 이 총 5회에 걸쳐 연재한 “ ‘일대일로’와 신국제질서의 형성”을 참조하기 바람.)


이상 서술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개발도상국들이 추동하는 다극화는 세계화를 한 단계 촉진하는 의미를 갖는다. 어차피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한 인류의 생산력 수준에 비추어 이제와서 세계화 이전 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류는 오직 이 과정을 더한층 추진함으로써만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다극화와 그에 기초한 민주적 신 국제질서의 수립은 각국이 진정한 비교우위,  그리고 자주적이고 호혜 원칙에 입각한 세계화를 통해서 현재 인류가 직면한 고질적인 세계적인 ‘과잉생산’ 문제와 ‘저개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도록 촉진할 것이며, 인류가 함께 진정한 ‘인류운명공동체’ 사회로 나아가는데 있어  튼실한 정치·경제적, 인문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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