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허영구(전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록일 : 20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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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 오랜만에 북한산을 찾았다. 북한산성 입구부터 플라타너스 낙엽이 떨어져 수북하게 쌓여 있다. 원효봉 뒤로는 백운대가 머리만 내밀고 있다. 10월 중순 설악산 단풍에 취하고 왔더니 북한산 단풍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잎이 많이 떨어지고 색깔도 바래고 있다. 

 

예전에 사람이 살았던 북한동(고양시 덕양구)에서 직선으로 백운대에 오르지 않고 중흥사 방향으로 향했다. 군데군데 단풍이 남아 있긴 하지만 떨어지거나 말라서 선명한 빛깔은 아니다. 그래도 아쉬워 사진에 담는다. 한편에서는 가는 계절이 아쉬운 듯 꽃을 피운 나무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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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가파른 등산로 앞에 ‘중성문(中城門)’이 서 있다. 북한산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 협곡에 쌓은 성인데 대서문에서 북한산성 내성까지 평탄한 지형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성이라 한다. 성 옆 암반에 작은 규모의 암문(暗門)이 숨겨져 있는데 성 안에서 생긴 시신을 중성문을 아닌 이 곳을 통해 내보냈다 하여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렀다 한다. 삶도 죽음도 한 인생인데 왜 그렇게 차별했을까?

 

조금 더 오르니 넓따란 바위와 함께 계곡의 여유로움을 보여주는 정자인 산영루가 있고, 왼쪽으로 26기 정도의 ‘북한산성선정비군’이 보인다. 산성 최고책임자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라는데 산성을 지켰던 승병이나 성을 보수하는 힘든 일을 도맡았을 노동자들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근처 태고사 경내에는 180년 수령의 보호수 귀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봄에 산을 다니다 보면 계곡 근처에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늘어져 하얀 꽃을 피우는 모습은 본 적은 있다. 그러나 나무 둘레가 3m에 달하는 귀룽나무를 본 적은 처음이다.  

 

중흥사를 왼편으로 두고 대남문으로 가는 방향과 갈라져 백운대로 향한다. 골짜기에 단풍나무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 낙엽이 진 상태다. 2주전 쯤 왔으면 볼만 했을 것 같다. 조금 오르니 절이 있었던 용암사지다. 1,711년 숙종이 북한산성을 쌓을 때 승병들이 머물렀던 11곳 사찰 중 하나였다. 무기고와 군량창고를 포함해 군사시설을 겸한 절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의 이름으로 승병제도가 폐지되면서 승병군이 해산됐고 쇠락했던 사찰은 한국전쟁 중에 대부분 파괴됐다. 바로 옆 무너진 삼층석탑의 갑석과 옥개석이 지난 시대를 씁쓸하게 회고시켜 준다. 이제 나뭇가지 사이로 노적봉과 만경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지나 대동문 북쪽에 위치하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인 용암문에 당도한다. 산성을 따라 걷는 길이 폐쇄되어 만경대 동쪽면의 멋있는 바위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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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만경대를 끼고 바윗길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눈앞에 우뚝 솟아오른 백운대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중생대의 두 번째 시기인 2억 130만년 전부터 1억 4500만년 전 사이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화강암이 분출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 인간에게는 200만 번의 생을 거듭할 세월이니 무긍하고 무진한 일이다.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 백운봉암문에 도착한다. 몇 년 전까지도 일제시기에 바꾼 위문(衛門)으로 불렀다. 하기야 북한산 역시 예전에는 백운봉, 인수봉, 만경대를 일러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렀는데 일제시기에 북한산으로 바뀌었다.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 김상헌이 끝까지 척화항전(斥和抗戰)을 주장하다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부른 시조에도 등장한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쟈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ᄯᅥᄂᆞ고쟈 ᄒᆞ랴마ᄂᆞᆫ시절(時節)  하 수상(殊常)ᄒᆞ니 올 동 말 동 ᄒᆞ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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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m 정도의 가파른 바위를 쇠줄을 잡고 오른다. 구름은 많이 끼었지만 정상에 서니 삼각산이 위용을 드러낸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특히 다양한 언어를 쓰는 젊은 외국인들이 많다. 가히 국제화(글로벌) 시대라 할 만하다.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기초연금’ 문제에 대한 동영상 하나 찍고 있는데 겨울 철새인 ‘바위종다리’가 바위 이곳 저곳을 바쁘게 걸어다니고 있다. 

 

커피 한잔 마시고 사진도 몇 컷 남긴다. 여러 번 백운대를 올랐지만 건너편 인수봉의 뿌리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느낀다. 흐린 날씨라 멋있는 석양을 볼 수는 없다. 다시 하산해야 한다. 가파른 골짜기 돌길을 끊임없이 내려간다. 그러나 설악산 서북능선 너덜바위길보다 훨씬 수훨하다는 데 위안을 삼는다.  

 

오후 5시가 되자 사찰 대동사에서 타종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숲속의 나무들조차 종소리를 경청하는 듯 조용하다. 이제 스마트폰 전등을 켜고 걷는다. 한 번씩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가만히 녹음해서 들어보니 물소리도 아니요, 바람소리도 아니다.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를 이렇게 실감 나게 들을 수 있다니! 신기하다. 

 

드디어 북한산성 입구다. 6시간 동안 9.4km를 오르락 내리락 걸었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차를 운전하며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서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 흘러나온다. 남양주시에 살 때는 천마산에 많이 다녔는데 고양시에 이사 와서 살다 보니 삼각산에 자주 갈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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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회, 북한산, 2023.10.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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