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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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혁명을  소재로한  영화 <레즈> 중의 내전 장면


동부전선의 형세는 레닌을 매우 불안하게 했다. 12월 13일, 레닌은 두번이나 트로츠키에게 전보를 보내 페름의 위급한 형세를 그에게 설명하고, 공화국 무장력총사령관 바시티스 (차르 러시아 시기 대령 )에게 우랄지역에 홍군 병력을 증원하개끔 독촉하도록 했다. 1919년 1월 1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는 연구 끝에 스탈린과 제르닌스키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을 구성해서 페름의 함락 원인을 조사하고, 제2, 제3집단군 관할구역의 당과 소비에트 업무를 회복할 것을 결정하였다.

 

1919년 1월 3일, 이 조사단은 제3집단군으로 출발해 5일 비아트카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레닌에게 편지를 써서 조사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총사령관이 파견한 부대는 믿음직하지 못하고, 심지어 일부는 우리를 적대시하므로 반드시 엄격히 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완전히 신뢰할 만한" 부대를 파견하여 제3집단군을 증원할 것을 요청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비아트카는 페름의 전철을 밟게 될것이다."라고 적었다.*

* <스탈린전집> 제4권, p166, 인민출판사.

 

1월 8일, 레닌은 이 편지를 바시티스 총사령관에게 전달하여 "이 요청을 중앙위원회의 요청 형식으로 군사 당국에 전달해 집행하라"고 지시했다. 조사단은 신속하게 행동을 취하여 패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사람들을 군사법정에 회부하고, 일부 지휘관과 정치위원들의 직무를 박탈했다. 소비에트 기관과 당 기관을 청소하고 새로운 성원들을 보충했다. 이와 동시에 홍군 병사에 대한 정치사업을 강화하고 규율을 공고히 하는 한편, 보급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월 말, 조사가 끝나고 조사단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레닌에게 1918년 12월 페름의 함락 원인에 관한 당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연합조사위원회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페름의 궤멸 상황을 기술한 후, 실패 원인에 대한 분석과 전선이 취해야 할 조치를 제시했다. 바시티스 총사령관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이는 스탈린이 매우 강한 업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일 처리의 효율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의 위상 또한 나날이 높아졌다.

 

1919년 3월, 스탈린은 러시아공산당 제8차 대회에 참가해 다수표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회 이후 소집된 중앙위원회 회의에서는 중앙정치국 위원과 조직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스탈린은 3월 30일 국가감찰인민위원부 감찰인민위원 (1920년 노농검사원 인민위원으로 개칭) 으로 임명됐다. 러시아공산당 제8차 당 대회는  당의 두번째 강령을 통과시켰는데, 스탈린은 당 강령 위원회의 성원 중 한명이었다. 이 당 강령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이 성행하는 시기에 통과되었기에 국내 정치와 경제의 중앙 집중화를 강조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강령이 통과된 후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1961년 소련 공산당 '22차 당 대회'에 가서야 새로운 당 강령이 채택되었다.

 

 1919년 봄, 페테르부르크의 정세는 심각했다. 유데니치와 협약국 부대가 페테르부르크를 맹공하여 단시일 내에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곳에 주둔한 제7집단군은 적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적은 5월 17일 얀부르크를 점령한 후 푸스코프, 암(Yam)시를 점령했다. 제7집단군은 싸우면서 페테르부르크로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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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유데니치

 

 5월 17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는 "필요한 모든 비상조치를 취하기 위해” 스탈린을 국방위원회 특별위원 자격으로 페테르부르크 전선에 파견키로 결정했다. 19일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스탈린은 이날 총사령관, 서부전선 사령관, 제7집단군 사령관이 참석하는 회의를 열고 페테르부르크 전선의 상황을 연구했다. 5월 27일, 레닌은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어 후방과 전선에서의 "조직적인 반란 활동"에 주의를 기울일 것과, 일단 발견되면 '긴급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에 따라 페테르부르크를 지키는 군부대에 탈영병, 반역자와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일련의 조치를 취해 무능한 자를 해직하고, 패배의 책임을 인정한 장교를 법정에 세워 내부의 기강을  바로세웠다. 이로 인해 페테르부르크 전선 상황은 눈에 띄게 호전되었으며, 부대의 규율은 강화되고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6월 13일, 페테르부르크 해안 방어요충지인 붉은 언덕 요새(Red Hill Fort)와 회색마 요새(Gray Horse Fort)에서 반혁명 반란이 일어났다. 붉은 군대는 즉시 육상과 해상에서 반란자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16일, 홍군은 이 두 요새를 모두 점령했다. 이날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레닌에게 보냈다.

 

붉은 언덕 요새와 회색마 요새를 점령해 두 포대 모두 완전해 졌습니다. 지금 모든 포대와 요새를 신속히 점검중입니다.
해군 전문가들은 해상에서 붉은 언덕 요새를 공략하는 것은 해군 과학에 위배된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나는 이 같은 소위 과학에 대해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붉은 언덕 요새를 신속하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나와 일반 비무장 인원이 작전에 거칠게 관여했고, 심지어는 해군과 육군의 명령을 취소하고 나 자신의 명령을 관철토록 강요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나는 과학을  존경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렇게 행동할 책임이 있습니다.*

* <스탈린전집>제4권,p232, 인민출판사.

 

6월 21일, 제7집단군은 백위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6월 21일부터 7월 8일까지 비델리차 전투에서 홍군은 핀란드 백위군을 국경 근처까지 몰아냈다. 8월 5일, 제7집단군 주력이 얀 요새를 해방시켰다. 8월 26일, 제15집단군은 서북으로 진공하여 프스코프를 탈환했다.
이렇게 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한 공로로 스탈린 역시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붉은 깃발 훈장을 받았다.

 

1919년 여름, 협약군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2차 연합 공격을 조직했다. 주요 전장은 남쪽에 집중되었는데, 주력은 데니킨이 지휘하는 약 15만 명의 백위군이었다. 백위군은 쿠반, 테레크, 크리미아, 돈바스, 드네프르 강 좌안 및 차리친 지역을 잇달아 점령했다. 8월 31일에는 키예프, 9월 20일에는 쿠르스크, 10월 6일에는 보로네시, 13일에는 오렐을 점령하여 툴라에 육박했다.

 

남부 전선에서 데니킨 백위군의 끊임없는 공격은 모스크바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反데니킨 공세를 조직하기 위해 9월 26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은 스탈린을 남부전선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 남부전선에 파견키로 결정했는데,  보로실로프와 젬랴치카 등이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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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데니킨(1915)

 

스탈린은 10월 3일 세르기예프스코예 마을에 있는 남방전선사령부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령부를 세르푸호프로 옮겼다. 스탈린은 15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전선 상황을 연구한 후 적에게 반격을 취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결정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투라ㅡ모스크바 지역의 안전을 보장하고, 남부전선을 강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겨울철 총반격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남동부 전선은 일시적으로 방어로 전환하였다. 데니킨이 우랄의 코사크와 합류하는 것을 막고, 동시에 일부 군대를 차출하여 모스크바를 방어토록 했다. 이러한 새로운 전략적 배치에 따르면 홍군은 데니킨의 정예 ‘지원군’ 사단을 무찌르는 것을 목표로 하여, 하르코프-돈바스-로스토프-돈강 선에 공격을 집중하게 된다.

 

스탈린은 당 중앙의 이같은 전략적 배치에 따라 남부전선에서 데니킨에게 일련의 타격을 가했다. 1919년 10월 20일 홍군은 오렐을 점령하고, 25일에 보로네시를 탈환하여 남부전선의 상황을 역전시켰다. 11월 9일, 스탈린은 쿠르스크에서 전면 공세를 개시하여 데니킨의 군대를 분쇄하라는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서명했다. 11월 18일, 홍군은 쿠르스크를 점령하였다. 12월 12일과 16일에는 각각 하르코프와 키예프를 해방시켰다. 1920년 1월 홍군은 차리친, 노보체르카스크, 돈 강변에 있는 로스토프를 탈환했다.

 

데니킨과의 전투에서 부조니 기병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20년 2월 초, 코카서스 전선(이전 동남 전선에서 명칭이 변경됨)에서 군대 간 조정 부족으로 인해 부조니 기병은 그곳에서 시작한 새로운 공세에서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부대는 피로가 극에 달했으며, 물질 보급이 심각하게 부족하고 규율이 해이해져 거의 와해 상태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공화국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코카서스를 강화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 노동군(1월 결성, 스탈린이 노동군위원회 위원장)에서 병력을 차출하라고 명령했다. 2월 18일, 스탈린은 레닌에게 전화를 걸어 총사령관의 명령에 반대하고, 상황을 명확히 하기 위해 자신을 모스크바로 소환해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의 전보를 받은 레닌은 다음 날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들에게 보낸 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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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니 기병

 

나는 스탈린을 소환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는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총사령관의 말은 완전히 옳습니다. 우선 데니킨을 이긴 후에 다시 평화상태로 전환해야 합니다.
나는 스탈린에게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을 요청합니다: "정치국은 지금 당신을 다시 부를 수 없다. 정치국은 현재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임무는 데니킨을 완전히 패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가능한 한 빨리 코카서스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

*<레닌전집>(2판) 제49권, p262, p721.

 

같은 날 레닌은 전보에 직접 서명하여 스탈린에게 보냈다. 20일 스탈린은 레닌의 전보를 받고 매우 화가 났다.

 

애시당초 내가 코카서스 전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코카서스 전선을 공고히 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전적으로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입니다. 그곳 성원들은 내가 알기로는 몸이 모두 건강하고,  스탈린 제가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저의 짐은 원래 과중합니다.

 

레닌은 즉시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냈다.

 

가능한 한 빨리 증원 부대를 남서부 전선에서 코카서스 전선으로 이동시킬 방법을 강구하라고 명령합니다. 어쨌거나 다양한 부서의 역량 배치에 대해서 논쟁하지 말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한 지원 제공이 필요합니다. *

*<레닌전집>(제2판) 49권, p395, p742.

 

스탈린은 할 수 없이 레닌에게 답전을 쳐 코카서스 전선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3월 23일, 스탈린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3월 29일부터 4월 5일까지 열린 러시아공산당 대회(제9차 당 대회)에 참가했다.

 

제9차 당 대회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동원, 노동의무제의 실시, 경제군사화 및 경제를 위해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등의 문제에 관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요강을 승인하였다. 노동군 창설을 국민경제 노동력을 보장하는 유일한 좋은 방법으로 삼고, 군사적 방법을 평화시기의 경제건설에 적용할 데에 관한 트로츠키의 주장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대회는 또한 기업에서 무제한 집단관리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면서 일인 책임제와 개인 책임제에 반대하고, 구 전문가의 사용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국가의 집중적 관리를 반대하는 사풀로노프 등 '민주집중파' 건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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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공산당 제9차  당 대회에서 레닌

 

5월 26일, 스탈린은 다시 남서부 전선으로의 파견 명령을 받았다. 당시 데니킨의 뒤를 이은 브랑겔(1920년 4월 초 데니킨은 브랑겔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자신은 터키로 피신함)은 점차 사기를 회복하고 부대를 확충했다. 이는 홍군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스탈린이 남서부 전선에 도착한 후, 그는 5월 29일과 6월 1일에 각각 레닌과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부의장인 스크랴스키(Sklyansky)에게 전보를 보내 크리미아 지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 보고했다. 남서부 전선의 상황이 심각하다고 보고 2개 사단을 증파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공교롭게도 서부전선 또한 긴박한 시기였다. 4월 25일 폴란드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여 키예프와 다른 우크라이나 도시들을 재빨리 점령하였다. 5월 4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크림반도와 코카서스에서의 군사작전을 중단하고, 서부 전선에서 폴란드군을 상대하는 데 역량을 집중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6월 2일 레닌은 스탈린에게 보낸 답전에서 그의 병력 증파 요구를 거부하고, 정치국의 상술한 결정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하면서 "정치국이 새로운 결정을 내릴 때까지 크림반도에 대한 공격을 잠시 중단하십시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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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의 스탈린


스탈린은 레닌의 답전을 받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레닌에게 이렇게 답전을 보냈다.

 

반복적으로 상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위원회가 2개 사단의 파견을 거부한 것은, 나중에 전선에서 발생하게 될 부정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조처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십시요.  정치국의 결정을 나는 기억하고 있지만, 브랑겔이 이를 무시하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방어선을 돌파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에, 나는 군사 행정 및 군사작전 성격의 예방조치를 취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뿐입니다.*

* <레닌전집>(2판) 제49권, p396.

 

스탈린은 여전히 군사적 수단으로 크림반도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다. 레닌은 "이것은 분명 공상이다.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 크지 않는가? 우리는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전히 크리미아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는데, 결국 남서부 집단군 (사령관 예고로프) 은 크리미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에 따라 트로츠키는 6월 14일 예고로프 남서부 집단군 사령관의 직무를 해임할 것을 권고했다. 스탈린은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와 트로츠키에게 전보를 보내 이 일에 대한 그의 견해를 표시했다.

 

우볼레비치 혹은 콜크로 예고로프를 교체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전자는 아직 이 직무를 맡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후자는 전선군 사령관을 맡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 예고로프와 총사령관이 함께 크리미아를 상실했다. 총사령관은 브랑겔이 공격하기 2주 전에 하르코프에 머물렀고, 그 후 모스크바에 갔으면서도 크리미아 집단군의 와해를 감지하지 못했다. 만약 이렇게 해서 누군가를 처벌해야 한다면 반드시 그들 두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지금 예고로프보다 더 좋은 인선을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총사령관을 경질해야 한다. 그는 극단적 낙관주의와 극단적 비관주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최전방 사령관을 속박했다. 그는 어떤 적극적인 방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D. An. Volkogonov, Triumph and Tragedy, 제1권, pp105-106.

 

한편, 스탈린은 전반적 상황을 고려하여 예고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과 제12군, 제14군 및 기타 부대에 대한 전투 명령에 서명하고, 홍군이 폴란드군 진지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6월 초 기병 1집단군이 우만을 출발해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먼저 돌파한 데 이어, 남서부 전선의 다른 부대들도 반격에 나섰다. 6월 12일, 홍군은 키예프를 공략한 후 이어서 또 지토미르, 베르디체프 등지를 해방시켰다. 북쪽에서는 서부전선 (사령관은 투하체프스키) 이 7월 초 공격을  개시해 폴란드군을 잇달아 격퇴했다. 7월 하순 서부전선의 홍군이 국경을 넘어 폴란드 북부로 진격했다. 8월 상순에 홍군은 이미 바르샤바에 접근했다.

 

남서부 전선에서 스탈린(오른쪽)과 혁명군사평의회 의원 예고로프(1920).jpg
스탈린 (오른쪽) 과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예고로프가 서남전선 에서(1920년)

 

스탈린은 홍군부대가 폴란드군과의 작전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두고 있을 무렵 7월 5일 레닌, 총사령관, 공화국 군사위원회에 각각 전보를 보내 크리미아 전선을 강화할 것을 요청했다. 7월 11일, 그는 [프라우다]에 <폴란드 전선의 상황 (프라우다 기자와의 대화)>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기고문에서 브랑겔이 폴란드군과 협력하고 있기에, 브랑겔을 없애기 전에는 '바르샤바 진군'이 불가능하다면서, "브랑겔을 없애야 폴란드 지주에 대한 우리의 승리가 보장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브랑겔을 기억해야 한다', 우선 '브랑겔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얼마 후 그는 브랑겔에 대한 작전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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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의 투하체프스키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심각한 브랑겔의 위협에 처해 있다는 스탈린의 견해에 동의했다. 8월 2일,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남서부 전선군으로부터 크리미아지역을 독립적인 남부전선군으로 분할하는 결정을 통과시켰는데,  스탈린이 이 부대를 전문적으로 브랑겔을 상대하는데 사용토록 했다. 이날 레닌은 이 결정을 스탈린에게 전보로 통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부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기 때문에 특히 쿠반, 그 다음 시베리아, 그리고 브랑겔이 큰 위협이 되었다. 이 때문에 중앙 내부는 점점 더 부르주아 폴란드와 즉각적인 강화를 맺으려는 분위기다. 나는 이미 총사령관과 상의했다. 그는 당신에게 더 많은 탄약, 원병, 비행기를 줄 것이다."[55] 


스탈린은 레닌의 전문을 받고 불쾌한 표정으로 그날 레닌에게 답전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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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의 브랑겔

 

 

잔혹한 전투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으며, 아마도 오늘 알레한드로프스크(Alexandrovsk)를 잃을 것입니다. 최전선 분할에 대한 당신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는데, 정치국은 그런 사소한 일을 논의해선 안됩니다. 나는 기껏해야 2주 동안 전선에서 일할 수 있고, 휴식이 필요합니다. 나를 대신할 사람을 물색해 주십시오. 총사령관의 약속을 나는 조금도 믿지 않으며, 그의 이런 약속은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중앙위원회 내부의 폴란드와의 강화 분위기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외교는 때때로 우리가 거둔 군사상 승리의 성과를 매우 성공적으로 파괴한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레닌전집>(2판) 제49권, p755.

 

8월 3일, 레닌은 스탈린의 이 전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왜 당신이 전선을 분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브랑겔로부터의 위협이 커지는 만큼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임자 인선 문제에 관한 당신의 의견을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 동시에 어떤 약속을 총사령관이 질질 끌면서 이행하지 않았는지를 나에게 알려 주세요. 우리 외교는 중앙위원회 결정에 복종합니다. 브랑겔의 위협이 중앙 내부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한, 우리 외교는 어느 때라도 우리의 승리를 훼손하지 않을 것입니다.*

 

* <레닌전집>(2판) 제49권, p482.

 

같은 날 카메네프 총사령관은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서부전선의 투하체프스키가 남서부 전선의 제12군과 제1기병군을 지휘토록 지시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반대하면서 총사령관의 지시를 집행하는 명령에 서명하길 거부했다.  8월 13일 카메네프는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제12군, 제14군, 제1기병군을 서부전선 사령부로 이관할 것을 다시 직접 지시했다.  스탈린과 예고로프는 총사령관에게 전선의 모든 군대가 이미 르보프-러시아 라바 지역 전투에 투입됐다고 보고하고, "이런 조건에서 각 집단군이 기본 임무의 전환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예고로프는 총사령관의 지시를 집행하라는 명령서를 작성했지만, 스탈린은 이 명령에 서명하길 거부했다. 제1기병 집단군은 8월 20일에야 리보프에서 철수해 폴란드 전선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8월 16일, 폴란드군이 바르샤바 근처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투하체프스키 부대는 비스툴라 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해야 했다. (여기서 소련 군대가 바르샤바에서 패배한 원인은 물론 다방면에 걸쳐 있다. 전선이 너무 길고 후방 보급이 부족하였으며, 지휘 상의 실수와 서남 전선과 서부전선의 작전이 조화롭지 못한 것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홍군이 바르샤바에 진출함으로써 폴란드 국민의 민족 감정을 어느 정도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후 쌍방은 휴전협상을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1921년 3월 18일 정식으로 '리가 조약'을 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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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 기병이 폴란드에 진입하고 있다

 

 

스탈린은 8월 17일 모스크바로 돌아와 19일 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트로츠키와 스탈린 동지의 군사보고를 청취한 후 부대의 주공 방향을 브랑겔군대에 대한 작전으로 전환키로 결정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은 남서부 전선의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직  해임을 요청했다. 9월 1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그의 요청에 동의했지만, 여전히 공화국의 혁명군사위원직을 유지토록 했다. 10월 16일, 스탈린은 또 북코카서스와 아제르바이잔으로 가서 그곳의 당과 소비에트 사업을 지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1월 20일에야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9월부터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남부전선에 대한 전력을 강화했다. 10월 26일 부조니의 제1 기병집단군은 폴란드전선에서 남부전선으로 이동했다. 남부전선에 집결한 홍군 부대는 브랑겔의 군대를 맹렬히 공격했다. 11월 17일, 크림 반도로 퇴각한 브랑겔의 군대가 전멸했다. 몇몇 우두머리들은 영국과 프랑스 배를 타고 해외로 도주했다. 1920년 말까지 내전과 외국의 무장 개입이 모두 끝나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20년 12월 제8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참석자들 단체 사진.jpg
1920년 12월 전 러시아소비에트 제8차 대표대회  기념사진 

 

 

스탈린의 10월 혁명 이후 경력을 보면 그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쳐있다. 당 업무도 있고 정부 업무도 있다. 국내 전쟁과 외국 무장 간섭 기간에 군사와 정치 업무도 맡았다. 빈번히 중앙 특파원 신분으로 이쪽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변혁의 시대에 스탈린은 점차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일부 국부적 지도자에서, 볼셰비키 당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소수 주요 지도자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의 지위는 끊임없이 상승하였으며, 영향력 또한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것은 그의 재능을 증명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일을 처리하는 작풍과 성격상 결함도 보여주었다. 이 같은 결함은 레닌이 집권할 때는 효과적으로 억제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이 스스로 집권한 후에는 자제력을 잃고 사회주의 사업에 있어 극히 해로운 요소가 되었다. 

 

한편, 스탈린은 소련이 전시 공산주의를 실시하던 시기에 주요 지도자로 점차 성장하였기에 , 그의 이러한 성장 경력은 분명 시대적인 자취를 지닌다. 이는 이후 스탈린 모델의 형성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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