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1.05
닥터지바고.jpg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

 

그러나 스탈린은 논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10월 1일 세르긴을 해임하고 보로실로프를 남부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이튿날인 10월 2일, 공화국혁명군사위원회는 남부전선혁명군사위원회에 그 이전의 지시를 집행하고 전선군 사령관의 작전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내렸다. 스베르들로프도 10월 2일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전보를 보냈다.

 

오늘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가 열렸고, 이후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야 할 모든 당 동지의 주제가 논의되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순종의 필요성은 여기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는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의 규정을 채택했습니다.... 전선 군사위원회는 혁명군사위원회의 모든 결정을 이행해야 합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의 통일이 없습니다. 결의의 집행을 중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만약 이의가 있으면-주) 상급 기관인 인민위원회나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호소할 수 있고, 최후의 수단으로 중앙위원회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혁명군사위원회의 결의를 집행해 주십시오. 이러한 결의가 해롭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여기로와 논의하고 그에 상응하는 결정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충돌도 없어야 합니다. 이 전보는 중앙의 위탁에 따라 발송함. (<스베르들로프선집>제3권,p28, 모스크바,1960년.)

 

그러나 스탈린, 보로실로프 등은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과 스베르들로프의 조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0월 3일 두 사람은 공동으로 레닌에게 전화를 걸어 중앙위원회에서 트로츠키의 행동에 대해 논의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차리친에서 코즐로프로 군사위원회를 옮기는 것과 사령부의 작전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트로츠키의 명령이 남부전선을 와해시킬 위험이 있다면서 "비당 반혁명분자 진영에서 온 군사전문가 문제를 다시 심의하자"고 제안했다.

 

10월 4일, 트로츠키는 스베르들로프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레닌에게 사본을 보냄):


나는 절대적으로 스탈린을 다시 소환할 것을 주장합니다. 차리친 전선은 병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보로실로프는 1개 연대를 지휘할 능력은 있지만 5만 명의 집단군을 지휘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부군 지휘관 세르긴에게 보고를 이행한다면 차리친에서 10집단군을 계속 지휘토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차리친 쪽은 코즐로프 쪽에 전투 보고서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매일 정찰과 작전 상황을 두 번 보고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내일까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는 보로실로프와 미닌을 체포하여 군사법정에 넘길 것이며, 이 사실을 군사명령으로 발표할 것입니다. 차리친은 반드시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중한 결과에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우월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만 상층부는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있습니다. 귀하의 확고하고 틀림없는 지원으로 24시간 이내에 이 상황을 종료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로츠키, <스탈린평전>(하),pp376-377.)

 

여기서 트로츠키 역시 통상적인 당내 상호관계의 준칙에 따라 신속하게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차리친의 간부들에게 난폭하고 예의 없는 태도를 취해서 충돌을 더욱 고조시켰다.

 

트로츠키(1919년).jpg
트로츠키 (1919년)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의 이러한 의견 불일치는 실제로 중앙위원회의 전체 군사 노선에 반대하는 러시아 공산당 내의 ‘군사반대파’의 표현이었다. ‘군사 반대파’는 짜르 군사 전문가의 사용을 반대하고, 군대에 철의 규율을 수립할 것을 반대하였다. 전투에서 게릴라식 작전을 옹호하고, 군대에 집단 명령 시스템(집단지도체제-주)을 실현하는 것을 옹호하였다. ‘군사 반대파’의 수자는 상당히 많았는데, 주요 인물은 스미르노프, 사파로프, 피다코프, 부브노프,  보로실로프, 미닌 등이었다. 스탈린은 비록 ‘군사 반대파’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가 실제로 그들을 지지한다는 점은 남부전선 군사위원회에서의 그의 행동을 통해 증명될 수 있다. 보로실로프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러시아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시 각급 홍군 전투부대 수장 중 당원들은 이른바 전문가의 흡수에 반대했다. 당시 나와 의견이 일치한 사람 중에는 스탈린 동지도 있었다. 그는 100% 이 점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 <소비에트 무장력:문제와 답>, p61,모스크바 1987년;  <스탈린 리서치>1993년 1집, p160.


 소비에트연방 백과사전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한 기록을 하고 있다. "제8차 당 대회 전이나 이 대회 이후 군사 문제에서 그 (스탈린)는 당의 노선을 벗어났고, 러시아공산당  중앙의 직접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 (1918년 차리친 전선, 1920년 서남 전선 등)。사실 스탈린은 군사 전문가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계속 옳지 않은 입장을 취했다."(<소련 역사 백과사전> 3권,p548, 모스크바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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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차크 제독의 백군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 내의 이견은 부대의 전투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정면충돌도 레닌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레닌은 이 두 사람을 모두 필요로 했다. 레닌은 그들의 불일치로 인해 부대의 전투력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트로츠키를 더 많이 지원했다. 그 후 중앙위원회는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를 개편하여 새로운 군사위원회를 세르긴, 메호노신, 포 바 레그란으로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스탈린을 남부전선에서 소환키로 하였다. 스베르들로프는 직접 전용열차를 타고 중앙을 대표해 그를 마중했다. 10월 8일, 스탈린은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레닌은 당일 그를 불렀다. 두 사람은 남부전선의 정세와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레닌은 스탈린의 업무 능력에 대해 감탄했다. 스탈린이 섭섭해하지 않도록  인민위원회는 그를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레닌은 스탈린이 잠시 차리친으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했다.

 

 이때의 차리친 형세는 상당히 위급했다. 코사크 백위군은 이미 10월 2일과 8일에 그닐로 악사이스카야(Gnilo Aksayskaya)와 진구타(Jinguta) 마을을 점령하고 볼가강 좌측 언덕을 건넜다. 10월 15일까지 적들은 차리친 근교의 살레프타, 뷰크토프카, 오트라드노예 등지를 잇달아 점령하였으며, 곧 차리친 시내로 돌입하려는 태세를 취했다. 바로 이때 북코카서스에서 질루오바(Zhiluoba)의 ‘강철’ 사단이 제때에 도착했다. 그들은 제10 집단군과 함께 백위군을 120킬로미터 떨어진 돈강 서쪽 기슭으로 몰아 냈다. 소비에트군대는 이번에야말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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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당시 국제 간섭군 활동 지역

 

차리친을 지키는 데 있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대가는 엄청나서 소비에트군은 6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보로실로프는 러시아공산당 ‘8차 대회’에서 발언할 때 자화자찬 격으로 자신이 짜르 군사전문가의 도움 없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보로실로프는 차리친 집단군이 차리친을 보위하는 큰 공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보로실로프 동지는 물론 절대적으로 옳으며, 역사상 그런 영웅주의를 찾기는 어렵다. 이는 확실히 매우 거대하고 눈부신 업적이다. 그러나 지금 보로실로프 자신도 연설할 때 게릴라주의의 끔찍한 흔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보로실로프 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군사전문가가 없고, 6만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군사 전문가가 없는 상황에서 6만 명의 사상자를 대가로 얻은 것이다... 군사 전문가 없이도 우리가 잘 대처했다고 하는데, 이게 어떻게 당의 노선인가? 중앙위원회의 잘못은 당의 노선을 관철시키지 못한데 있다. 보로실로프 동지의 잘못은 그가 낡은 게릴라 습성을 버리기를 꺼렸다는데 있다. 이런 게릴라 습성의 잔재는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이미 근절될 때가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이 동지들이 아직 게릴라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들 군사 반대파의 모든 잘못은 바로 당신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런 게릴라적 습성과 연계시켰기 때문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영웅주의 전통을 이런 게릴라적 습성과 연계시켰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들이 지금은 또 다른 시기라는 점을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생겼다. 이제 첫 번째 문제는 정규군이 있어야 하며, 군사 전문가를 보유한 정규군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들의 개요(槪要)에서 한편으로는 군사 전문가를 찬성한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선 또 집단적 지휘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다. 당신들은 군사 전문가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적에게 투항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강령 초안에서 그들이 자본가계급 세계관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임무는 어떠한 반혁명 음모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은 우리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나는 당신들이 자신의 협소한 테두리 내에서 사물을 보는 것에 놀랐다.

 

 당신들은 우리가 용감하게 차리친을 지켰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연단에 올라 당 대회에서 연설한다면, 당신은 전체 당 노선과 당 강령을 후퇴시키는 것이다. 당신들은 낡은 게릴라적 습성을 유지하고 있다. 당신들은 완전히 군사전문가와 반대되는 테제를 내놓으며 당 전체의 전략을 훼손하고 있다. … 만약 거기에 군사전문가가 있고 정규군을 중시했더라면  6만 명을 희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유격활동 시기를 겪어왔다. 아마도 시베리아와 같은 어떤 곳에서는 유격활동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시대는 끝났다. 만약 여기서 어떤 사람이 유격활동 시대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가장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절대로, 절대 안 된다!  (<레닌전집>(2판) 36권, pp174-176, 인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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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실로프

 

10월 19일, 스탈린은 또 차리친을 출발해서 10월 22일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이날 그는 레닌에게 차리친에서 소비에트군이 이룩한 승리를 보고하였다. 보로실로프와 미닌을 설복하여 그들이 중앙의 명령에 완전히 복종토록 했다고 보고하고, 자신은 남부전선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남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세르긴과 메코노신과 협력해 그들과 함께 일하는데 동의했다. 이날 레닌은 스탈린의 이런 의견을 트로츠키에게 전보로 알렸다.

 

레프 다비도비치(트로츠키-주), 내가 당신에게 스탈린에 대한 이 모든 의견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하고 답해주십시요.  첫째, 당신은 스탈린에게 직접 설명하는 것에 동의합니까? 그는 이를 위해 당신을 찾아가는 데에 동의합니다. 둘째, 당신은 일정한 구체적 조건 하에서 이전의 꺼끄러운 관계를 해소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스탈린이 바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엔 스탈린과 좋은 업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닌전집> (2판) 48권, pp382-383, 인민출판사)

 

화해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스탈린은 11월 6일 [프라우다]에 <10월 혁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였는데, 여기서 10월 페테로부르크 무장봉기에서의 트로츠키 역할을 충분히 긍정하였다. 스탈린은 이처럼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트로츠키는 응답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이번에는 차리친에서 돌아온 후 잠시 남부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솔직히 스탈린은 차리친에 있는 동안 식량을 조직하고 백위군의 공격을 물리치는데 기여했지만, '군사 반대파'를 지지하고 짜르 군사 전문가를 배척해서 군의 전력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는 "안심하세요. 우리의 손은 결코 떨리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사상적 지도하에 많은 사람들을 잘못 죽였다. 이에 대해 레닌은 "스탈린이 차리친에서 사람을 총살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잘못 총살했다고 본다."라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 (<레닌전집>(2판) 36권, p172, 인민출판사)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머물렀지만 구체적으로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남부전선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레닌은 끝내 그를 즉시 가도록 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10월 혁명과 민족 문제>, <동방을 잊지 말자> 등의 글을 썼다. <동방을 잊지 말자>는 [민족생활보]를 위해 쓴 사설이다. 그는 거기서 1분도 동방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동방은 ‘세계 제국주의의’ 무궁무진한 ‘예비역량’이자 '가장 든든한' 후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승리를 원하는 사람은 동방을 잊어서는 안된다" ,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바로 "동방의 억압된 민족들이 수백년의 깊은 잠을 깨고, 이들 나라의 노동자와 농민을 혁명적 해방 정신으로 무장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에 ​​반대토록 각성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전집>(4권), pp152-154, 인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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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군 장교들

 

11월 6일부터 9일까지 스탈린은 제6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특별대회에 참석하여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3일 열린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그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11월 30일, 전러시아 중앙 집행위원회는 노동자-농민 국방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레닌이 위원장이 되고, 스탈린은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노-농 국방위원회는 소비에트 국가의 방위를 위하여 인력과 물적자원을 총동원하는 전권을 가진 소련의 최고기관으로 매우 강력한 부서이다. 국방위원회의 의결은 중앙과 지방의 각 부처와 기관에서 집행하여야 한다. 12월 1일, 노-농 국방위원회는 제1차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레닌, 스탈린에게 국방위원회 소속 각 위원회 결의를 비준할 권한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이 모든 것은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레닌이 스탈린의 능력에 대한 긍정이며, 그를 남부전선으로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남부전선 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12월 중순, 그는 아직 차리친에 있는 보로실로프와 함께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의 일원인 A. I. 오쿨로프가 조직을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1918년 12월에 이 위원회 위원으로 방금 임명되었다.) 그는 오쿨로프를 차출할 것을 요구했다. 12월 14일, 트로츠키는 이 일 때문에 쿠르스크에서 레닌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쿨로프를 전근시키는 문제는 이 문제 자체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쿨로프에 대한 임명은 보로실로프에 대한 대응이고, 군사명령이 집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로실로프가 타협을 위한 모든 노력을 파괴한 후에는 그를 유임시킬 수 없습니다. 차리친에는 새로운 혁명군사위원회와 새로운 지휘관이 있어야 하고, 보로실로프는 우크라이나에 가야 합니다.

(트로츠키, <스탈린평전>(하),p381) 

 

그러나 레닌은 이 일에 대해서 훨씬 부드럽게 다루었다. 레닌은 저울 끝에 "보로실로프와 오쿨로프 사이의 극도로 긴장된 관계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오쿨로프를 대신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결정했다. 레닌은 여기에서 스탈린 등의 요구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쿠로프를 비난하지 않았다. 반면 러시아공산당 ‘8차 당대회"에서 그는 오쿨로프를 옹호하며 보로실로프를 비판하기까지 했다. "보로실로프 동지가 이런 괴담을 만들어 군대를 파괴한 것은 오쿨로프라고 했다. 정말 충격적이다. 오쿨로프는 중앙의 노선을 집행했다. 오쿨로프는 그곳에 여전히 게릴라적 습성이 존재한다고 여러 차례 보고했다."*12월 26일, 레닌의 동의를 거쳐 보로실로프는 차리친 제10집단군에서 전출되어, 그 후  우크라이나로 파견되었다. 그 직위는 Y. I. 예고로프(Yegorov)가 인계받았다.

 

* <레닌전집>(2판) 36권, 175-176, 인민출판사.

 

1918년 11월 말, 해군 제독 고르차크가 이끄는 백위군이 시베리아에서 서쪽으로 침범하여 북방의 외국 무장 간섭군과 합류하려 했다. 홍군 제3집단군이 주둔하고 있는 우랄의 중요한 도시 페름이 함락되었다. 만약 그들의 공격 기세를 막지 못한다면 모스크바의 안전이 위협당하게 된다. (계속)

 

미군 병사들.jpg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행군하는 미 제31보병대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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