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박현욱 (노동예술단 선언)
등록일 : 2024.03.07

 

[문화] 초나로의 노랫소리.jpg

 

 

완전히 포위당했지만 죽기로 싸워 기세가 꺾이지 않던 초나라 군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것은 신무기도 일기당천의 장수도 아닌 ‘노래’였다. ‘사면초가’라는 유명한 사자성어를 낳은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 이야기. 한나라 군에 포위된 채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향의 노랫소리에 초나라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요즘 들어 이 고사가 자주 떠오른다. 곤봉과 방패와 물대포로 포위되었을 때보다 더 큰 공포와 무력감. 사방에서 자본의 노래가 들려오고, 그렇게 자본의 문화에 포위당한 채 무너져 가는 느낌이다. ‘에이, 또 오버한다…’라고 말하실 분도 계실 테지만…. 생각이나 했겠나? 노랫소리 하나에 그렇게 허무하게 군대가 무너질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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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공포나 무력감까지? 요즘 나의 사방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가 있다. 민주노조에 몇 남지 않은 문화패들의 노랫소리가 아닌 곡소리다. 집행부 재정비와 대의원대회가 이어지는 요즘, 며칠 사이 찾아간 현장의 문화패들은 공통으로 한숨을 푹푹 쉰다. ‘또 문화패 예산 없앤대요. 문화패 운영 안 한대요….’ 자주 그래왔고 그럴 때마다 문화패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며 방어해 왔지만, 이번엔 정말 초나라 군사들처럼 전의를 상실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민주노조는 아주 힘드니까. ‘이 힘든 상황에 한가하게 문화 타령이라니?’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 간부들이나 활동가들을 만나 문화활동에 대해 말할 때마다 천덕꾸러기가 된 느낌이다. 며칠 전 한 노조에서 주최한 ‘민주노조에서의 문화패 활동’과 관련한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가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토론회를 주최한 동지에게 ‘바쁘실 텐데 이런 것까지….’라는 말을 해버렸다. 뭐야…. 나도 초나라 군사가 되어 가는 건가….

 

아무튼 그럴 만하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 역설적이게도 민주노조는 매우 힘드니까 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미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 중의 하나가 땅굴 전술인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좁은 지하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버티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호찌민은 곳곳에 비교적 넓은 공간을 공연장으로 만들게 했다. ‘무려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그 순간에 한가하게 공연장이라니?’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그토록 급박한 절체절명의 상황이기에 더더욱 한 칸의 무기고만큼이나 한 평의 공연장이 필요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터널에서 8년을 버틸 힘. 그것은 무엇보다 강력한 문화의 힘인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

 

민주노조의 문화패는 바로 그 땅굴의 공연장 같은 존재이고 또 그래야 한다. 실제로 자본과 군사독재,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어용노조의 극악한 탄압 속에서도 민주노조의 꽃을 피워내고 민주노총까지 탄생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노동자 문화패라는 힘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공단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풍물을 치고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하며 키워낸 노동자 의식이 민주노조를 만들어 내는 밑거름이 되고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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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가끔 얘기를 나눌 때면 모진 탄압 속에서도 한국 노동운동이 역동성을 잃지 않는 이유는 풍부한 노동자문화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 문화패가 지금은 민주노조에서 거의 천덕꾸러기 취급 받으며 소멸해 가고 있다. 물론 때가 되어서 자연스레 소멸해 가는 거라면 뭐가 문제겠는가? 하지만 노동자 자본가 간 계급대립은 전혀 소멸하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하는 자본의 위기 속에서 더욱 격화하고 있지 않은가! 소멸은커녕 노동자문화의 힘과 문화패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서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호미로 땅굴을 파고 그 안에 공연장을 만들던 호찌민과 베트남 민중의 심정으로 이 사면초가의 상황을 좀 더 냉정하게 볼 일이다. ‘예산이 없어서, 할 사람이 없어서, 본인들 노래하고 춤추는 걸 왜 노조가 지원해야 하냐?, 딱딱하고 구려서….’ 등 문화패를 없애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지양의 대상이지 폐기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해서 본질을 따져 보자면, 우선 노동운동이 전망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계급해방, 세계해방이라는 운동의 전망이 사라지면 노동자는 계급적 존재가 아닌 자본주의의 한 구성원이라는 정체성만 남게 된다. 당연히 노동자계급문화는 어색하거나 불필요해지고 그 자리엔 본인들의 정체성과 더 가까운 대중문화가 채워지게 된다. 또한 문화패와 문화활동가들도 자신들의 활동을 성찰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계급적 문화활동이라는 목적의식성은 사라지고 공연단이 되어버린 채 관성적인 활동을 반복한다면 당연히 조합원들로부터 외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문화는 그저 엔터테인먼트라는 인식이다. 심지어 헌신적인 활동가들조차 그런 인식을 가진 경우가 많다. 물론 문화에는 그러한 요소도 있지만 그럼에도 더 깊은 본질은 이데올로기다. ‘한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다’라고 맑스가 말했듯. 노동해방은 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숨구멍 하나만큼이라도 파열구를 낼 때만 가능할 것이며 바로 그 숨구멍을 낼 송곳이 노동자문화이며 문화패이다.

 

출처 : <노동자신문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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