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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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상징인  '전력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스탈린을 비롯한 중앙 다수파와 투쟁할 때, 트로츠키는 일부러 그들의 격렬한 논쟁 밖에 머물렸다. 당 최고기관 회의에 참석할 때는 소설을 들고 다니기도 했는데, 아무리 격렬하게 변론이 진행돼도 그는 듣지 못한 듯 차분히 책만 읽었다.


한때 당내 투쟁에서 실패하고 임대(賃貸)위원회 위원장, 전기기술관리국 국장, 공업과학기술위원회 주임 등 3 개의 기술 직책을 맡은 뒤 이런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여러 실험실을 참관하고, 틈틈이 화학과 유체역학 관련한 교과서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적어도 겉으로는 중앙정치국에 순응하면서 중앙 다수파와 어떤 양해를 구하려는 듯 했다. 1925년 7월 정치국의 조언을 받아 <레닌 사후>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그는, 레닌의 '유언장'과 당내 투쟁에 대한 미국 기자 이스트먼의 주장을 비판하며 레닌은 전혀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으며, '유언장'을 은폐하거나 위반했다는 모든 논조는 악의적인 날조라고 했다. 하지만 이처럼 화해하고 싶은 트로츠키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트로츠키 세 사람은 앙숙관계 였다. 당초 바로 그들 두 사람이 트로츠키를 당에서 제명할 것을 극력 주장했다. 1925년까지 그들 둘이 스탈린을 중심으로한 중앙다수파에 반대하고 나섰을 때도, 여전히 트로츠키를 짓밟는 것을  그들은 잊지 않았으며, 트로츠키주의 문제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앙다수파를 비판했다. 14차 당대회를 앞두고 지노비예프의 지지자들은 레닌그라드에서 중앙을 ‘반(半)트로츠키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내 투쟁에서 자신들이 패배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에 대해 그들은 매우 분개하고 낙담했다. 어쩐 일인지 그때 그들은 다시 트로츠키를 생각해 냈다. 같은 운명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관점상 어떤 일치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겸한 것일 수도 있다. 1926년 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와 사적 접촉을 갖고 그들이 손을 잡을 가능성에 대해 비밀리에 논의를 시작했다.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에게 "당신이 지노비예프와 한 무대에 서기만 하면, 당은 이것이 진정한 중앙위원회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트로츠키는 좀 더 현실적으로 "우리는 멀리 봐야 한다…… 투쟁을 위해서는 이 투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장기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 사이의 접촉에 대해 각자 지지자들의 태도는 달랐다. 어떤 사람은 동의하고, 어떤 사람은 결연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 때나 회의 후에 모두 친근한 모습을 보였다.


1926년 4월 6~9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번 회의에선 주로 경제문제를 논의하였다. 스탈린은 경제 상황과 경제 정책에 관한 연설을 하였으며, <중앙 정치국과 중앙 전원회의 1926년 업무 계획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했다. 리코프는 경제 임무에 관한 보고를 했다. 회의에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리코프의 보고에 대해 부유한 농촌 지역에 대한 세금 추가 징수, 산업화 발전 속도의 가속화, 일용품 생산 확대, 노동자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비판과 수많은 수정 의견을 제시했다. 트로츠키는 또 국영 산업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당 중앙위원회의 정책을 '꽁무니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들 정책을 위한 재원은 농업세 인상과 공산품 가격 인상에 의존해야 한다면서, 산업 투자를 30% 확대할 것을 고수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프레오브라임스키의 견해에 찬성하면서, '사회주의 원시적 축적방식'으로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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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리과 키로프, 슈베르니크(레닌그라드, 1926년 4월 12-13일).

 

1926년 4월 13일,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당 조직 열성 분자들에게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그들 세 사람의 관점을 논박했다. 스탈린은 "우리 당에는 근로 농민 대중을 이류(異類)로, 공업의 착취 대상으로, 우리나라 공업의 식민지와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동지들, 이 사람들은 위험하다. 노동자계급에게 농민은 착취 대상일 수 없고, 식민지일 수도 없다. 농민경제는 공업에 있어 시장이고,  그것은 공업이 농민경제의 시장인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전집 8권, 128쪽)  뒷말이지만, 3년 후 스탈린은 전면적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할 때 자신의 이런 말을 잊어버렸으며, 자신이 비판했던 바를 다소간 채택했다.


전원회의가 폐막한 직후인 4월 중순, 트로츠키는 고열병에 걸려 아내와 함께 베를린에 가 치료를 받기로 했다. 정치국은 트로츠키에게 가지 말기를 권유했지만, 그는 결국 듣지 않고 떠났다. 떠날 때 그의 아내와 비서, 게버우(소련국가안전위원회 약칭) 요원을 한명 데리고 갔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정거장까지 갔다. 훗날 트로츠키에 따르면 그들은 송별할 때의 감정이 매우 진지했으며, "스탈린과 관점상의 일치를 간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그들 관계가 이미 밀접해졌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은 그들 세사람의 활동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4월 24일, 스탈린을 옹호하는 10명의 중앙위원들은 연명으로 레닌의 1917년 10월 18일 <볼셰비키당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은 이 서한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두 사람의 무장봉기와 관련한 기밀 누설을 비판하면서, 그들을 ‘노동자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크루프스카야 등은 성명을 내고 이런 움직임에 다른 속셈이 있다면서, 레닌이 만년에 구술한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와 <민족 또는 '자치화' 문제> 두 글을 근거로 반발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이 두 문헌과 관련한 어떤 글을 쓰든지간에, 그들이 10월 무장봉기에 대해 파괴적인 행위를 했기에 레닌이 그들을 당에서 제명할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숨길수 없다고 주장했다.  며칠 뒤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지노비예프가 파벌 활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5월 8일과 15일, 스탈린은 또 두 번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소련공산당 대표단에 편지를 써 지노비예프가 코민테른에서 파벌 활동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했다.

 

지노비예프 등도 확실히 소련 각지에서 공개적이거나 비밀스러운 회의를 열고, 비밀문건을 배포하면서 일부 당 조직에는 파벌집단을 결성했다. 지노비예프의 옹호자인 게베렌키는 오데사에 가 불법 파벌 집단을 세웠는데, 그 역시 코민테른 회원이었다. 6월 6일, 그는 모스크바 근교 한 숲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70여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모두 모스크바의 '붉은 프레스니아' 지역의 공산당원들이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자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인 라셰비치가 집회에서 보고를 하고, 반대파의 파벌조직을 만들고 당중앙위원회와 맞설 것을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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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지노비예프. 당시 그는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정치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곧 당 중앙에서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중앙감찰위원회 주석단은 전문적인 조사위원회를 설립하여 ‘라셰비치 사건’을 심리했다. 6월 12일, 중앙감독위원회 주석단은 조사위원회의 보고에 기초하여 라셰비치를 포함한 7명의 회의 참가자에 대해서 당내 징계 처분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이때 스탈린은 코카서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6월 15일 몰로토프, 부하린에게 편지를 보내 반대파가 코민테른을 통해서 당을 파괴하려 한다고 말했다. "나는 당이 파괴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커다란 불안은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당의 불상사를 막으려면 우리가 반대파의 사람들이 재결합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라셰비치를 처리하는 당신들의 방법은 옳다. 지노비예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좋다. 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위의 열거한 문제에 관한 정치국 보고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회부하여 거기서 토론토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론에서 정치국 내부 다툼의 상황을 되돌아보고, 전원회의가 입장을 표명토록 하자"라고 말했다. "나는 머지않아 당이 트로츠키, 그리샤 (지노비예프-주) 와 카메네프의 추악한 몰골을 폭로하여, 그들을 슈뢰프니코프와 같은 반역자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내는 편지(1926년6월15일)" , <스탈린연구> 1994년 제3집 3-4쪽.


'라셰비치 사건'에 대해 스탈린은 오랫동안 숙고했다. 이 사건은 전체 '반대파 집단'과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마침내  원래 "이 문제는 전체 반대파 집단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다.  6월 25일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편지로 써서 몰로토프, 리코프, 부하린 등에게 알려주었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 지노비예프 집단은 반대파의 모든 분열 활동의 선동자이자, 당내 분열파의 실제 수령으로서 해악이 가장 큰 집단이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타격을 해야 할 집단도 바로 이 집단이다. 따라서 "라셰비치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할 뿐 아니라, 지노비예프를 정치국에서 제명하는 동시에, 그가 분열 활동을 계속한다면 중앙위원회에서도 제명해야 한다고 경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노비예프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서 맡은 직무에 대해선, "그를 정치국에서 제명한 후, 그는 더 이상 (코민테른) 의장직을 맡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각국 지부는 모두 알게 될 것이고, 그들 자신도 필요한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때 우리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책임제를 서기처 책임제로 바꿀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지노비예프 집단은 전투력을 잃게 되고, 파렴치하게 분열을 조장하는 지노비예프 노선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곧 열릴 전원회의에서는 간단한 결의 하나만 하고, "레닌이 제10차 대회에 제출한 통일에 관한 결의를 인용하여, 라셰비치 사건과 결합시켜 좁은 의미에서 통일 문제를 논의하자. 이 결의를 통해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제명된 것은 그가 중앙위원회와 (정치적-주) 이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와 똑같이 심각한 이견을 가지고 있지만, 트로츠키를 정치국에서 제명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지노비예프가) 분열 정책을 집행했기 때문이다......제르진스키가 지노비예프를 대신해 정치국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은 당내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국 위원 수를 10명으로 확대해 제르진스키와 루주타크를 모두 정치국에 들여보내자"고 제안했다. 전원회의에서 크고 완벽한 결의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게 할 경우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를 정식으로 같은 진영으로 연합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방법은 현재 시기상조일 수 있으며, 전략적으로도 적합하지 않다. 이 문제에 관해 말할 것도 없이 그들 각자를 격파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위의 책, 5-8쪽)


정치생명이 걸린 사투가 곧 시작될 것임을 예고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트로츠키는 연합의 속도를 높였다. 1926년 6월 26일 지노비예프는 중앙감찰위원회 의장단 연설에서 "우리 두 파벌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은 부패하고 있는 스탈린과 그의 친구들에 반대하기 위해 단결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내 일부 상황의 본질을 잘 몰라 2년 동안 서로 싸웠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앞으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얼마 후 트로츠키도 " <10월의 교훈>이란 책에서, 나는 분명 당의 정책에서 일부 기회주의적 움직임과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이름을 연관시켰다. 중앙 내부 사상투쟁의 경험이 증명하듯 이는 매우 잘못이다. 이 오류의 원인은 7인*내부의 사상 투쟁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기회주의 움직임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동지에 반대하는 스탈린이 이끄는 파에서 비롯되었다고 즉각적인 단정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옛날의 앙금을 털고 연대로 가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은 그들의 이런 동맹을 "서로 '대사면'을 내렸다"라고 비꼬면서,  "방자하고 꺼리낌 없는, 무원칙한 거래"**라고 규정했다.

 

* 스탈린, 리코프, 톰스키, 지노비예프, 가미네프, 부할린 6명의 정치국 위원과 중앙감찰위원회 위원장 구비셰프로 구성된 '7인 그룹'을 말한다. 이 그룹은 원래 트로츠키와 싸우기 위해 결성됐다.

** <스탈린전집> 제8권 209-210쪽,  메드베데프 <역사를 심판하라>  93쪽 참조.


트로츠키ㅡ지노비예프 연합의 첫 행동은 그들이 공동으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7월 전원회의에 <13인 성명>을 제출한 것이다. 이 성명에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라셰비치, 예브도키모프, 크루프스카야 등이 서명했다.


‘13인 성명'은 처음부터 당의 최고위층이 관료주의적으로 타락하고 있으며, 당의 중앙감찰위원회가 “징벌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당내 비판을 억누르고 당의 일부 지도자들에게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라셰비치 사건'은 사실상 의견의 자유를 억압하고 비판을 억누른 사례라는 것이다. 중앙 다수파는 이번 사건을 '지노비예프 사건'으로 만들어서 반대파의 핵심 인물인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에 대한 계획적 타격을 노리고 있다고 했다. 당내 민주주의를 회복해야만 관료주의 타락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건설과 농촌정책과 관련해선, 그들은 전체 산업의 발전 속도가 전체 경제운동에 뒤처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공업화에 관한 14차 당대회 결의를 관철하여 공업화를 가속화 하고, 공업과 농업 간의 불균형 관계를 조정함과 동시에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자의 물질적 생활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농촌 정책에서 부농에 대한 과도한 관용 현상을 바꿔야 하며, 조세 및 가격정책을 통해서 부농에 세금을 부과하고, 고리대금업자의 빈농에 대한 노예화를 제한시켜야 한다. “빈농과 중농 동맹의 이름으로 빈농이 실제로 중농에 의존케 하고, 중농을 통해 부농에 의존하는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이 '13인 성명'을 7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낭독했다. 전원회의에서 양측은 경제문제, 산업화문제 및 농촌정책에 관해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전원회의는 또 '라셰비치 사건'을 검토했다.  회의는 이에 대해 “반대파는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관점을 방어하는 것으로부터, 당과 대립하고 당을 분열시킬 준비를 하는 전국적인 불법 조직으로 전환키로 결의했다”라고 규정했다. 이는 10차 당대회와 14차 당대회의 당 통합에 관한 결의를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며, 이 같은 파벌 활동은 절대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노비예프를 정치국에서 축출하고, 라셰비치는 중앙위원회에서 축출하며, 그의 혁명군사위 부주석직을 해임하고 2년간 당 책임자로 일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노비예프 대신 루주타크가 정치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는 1926년 6월 25일 스탈린의 의견이 전원회의에서 완전히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제르진스키는 스탈린의 의도대로 정치국원이 되지는 못했다.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7월 20일 갑자기 사망해서, 비·루 민진스키가 그를 대신해 국가정치보위국 의장에 앉았다. 민진스키는 능력이 제한적이며 자주 병에 걸렸다. 그의 재임 기간(1926-1934)  실제로 이 중요한 기관의 업무는 부의장인 헨·야고다가 주관했다.

 

제르진스키 장례식에서의 스탈린 (1926년 7월).jpg
제르진스키 장례식에 참석한 스탈린 (19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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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의 야고다

 

7월 25일, 카메네프는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편지를 보내 그가 상업인민위원부에서 일하면서 처음부터 지지와 신임을 받지 못했다며, 그의 상무인민위원 직무를 해임하고 “요즘 흔히 상업인민위원으로 불리는 미코얀”을 이 자리에 앉혀줄 것을 요청했다. 8월 5일, 정치국은 카메네프의 '사표'를 받아들여 미코얀을 상업인민위원으로 임명했다. 카메네프는 이탈리아 주재 전권대표로 파견되었다.


트로츠키가 정치국 위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위원회 다수파가 전략적으로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을 때, 그의 직책도 지킬 수는 없었다.  9월이 되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시기가 곧 도래할 것으로 간주했다. 스탈린은 9월 23일 몰로토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만약 트로츠키가 '격노'하면서 '건곤일척'의 대결을 생각한다면, 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지금 그를 정치국에서 제명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며, 이는 그에게 달려 있다. 지금 상황은 그들이 당에 복종하거나, 당이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만약 당이 후자 (두 번째) 가능성을 허용한다면, 당은 더 이상 당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1926년9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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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의 미코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연합이 중앙위원회에서 실패하자, 새로운 지원세력을 찾기 위해 그들은 다양한 풀뿌리 기층조직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및 기타 대도시를 돌며 공장의 기층 당 조직 사이를 파고들고, 전단지를 뿌리고 연설을 하며 그들의 정강을 선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지자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많지는 않았다. 일부 지방 기층조직에선 종종 반대파 인사를 회의장에서 내쫓는 등 적대적 분위기도 나타났다.


9월 말, 전국에 산재한 반대파들은 당 지부(기층 세포) 대회에서 동시에 운동을 전개하고, 당 중앙이 '14차 당대회'에서 이미 결정한 기본문제를 재검토하도록 강요했다고 선언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피다코프, 라디크, 사프론노프, 스미르가(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모스크바 항공기기 공장 지부 총회에 참석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그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반대파가 '정공법'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우다]는 10월 2일 사설을 통해 "당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반대파의 이런 활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0월 7일, 지노비예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자신만만하게 레닌그라드의 몇몇 공장을 방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반대파의 의견을 경청하도록 했지만, 그 역시 큰코를 닥치고 빈정거림을 받았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연합 분자들은 퇴각을 결정했다. 10월 16일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소콜리니코프, 피다코프, 트로츠키, 예프도키모프는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당 규율을 위반하고, 당이 결정한 사상투쟁의 범위를 넘어 파벌 활동의 길로 나아가는 절차는 절대적으로 잘못됐다."라고 인정하는 성명(역사에서 '6인 성명'으로 부름)에 서명했다. 당 규약을 준수하고 중앙의 결의에 복종하며, 파벌활동이 멈출 때까지 그것을 옹호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의 공산당 파벌과도 선을 긋겠다고 천명했다. 반대파들은 지난 10월 4일에도 중앙위원회에 '당내 갈등'을 접고 “함께 일하자”는 화해 제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중앙위원회 다수파는 이들이 보낸 올리브 가지를 받지 않았다. 스탈린은 "그들이 원칙을 버리지 않은 채 기존 입장을 유지하기로 한 만큼, 힘을 모은 뒤에 다시 반대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점에 있어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다."*고 말했다. (<스탈린전집> 8권,  2215-216쪽)


1926년 10월 23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 합동 전원회의를 개최했다. 스탈린은 이 자리에서 반대파 및 당내 상황에 관해, 몰로토프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연합 수장의 파벌 활동으로 인한 당내 상황에 관해 보고했다. 전체회의는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피다코프, 예브도키모프, 소콜리니코프 등에게 경고하고, 트로츠키의 정치국 위원과 카메네프의 정치국 후보위원직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지노비예프에 대해선 "더 이상 코민테른에서 일할 수 없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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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코프

 

이날 채트킨, 토리아티, 디미트로프 등 저명한 국제공산주의 활동가들이 각자의 당을 대표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단에 지노비예프가 코민테른에서 다시 일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동의를 제출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1월 제7차 확대총회를 열고 지노비예프의 코민테른 지도 직무를 정식으로 해임했다. 이와 함께 코민테른 주석단 제도를 폐지하고, 코민테른 '정치서기처'를 신설키로 결정했다. 부하린이 초대 집행위원회 정치서기처 서기로 선출되었다.


지노비예프가 코민테른 집행위원장직에서 해임된 것은 소련공산당 내 투쟁의 결과이지, 그가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한 때문은 아니다. 실제 레닌 시절 그의 코민테른에서의 입장은 러시아 공산당 입장과 일치했다. 그는  레닌과 전체 러시아공산당의 생각에 따라, 코민테른 초기에 제2 인터내셔널 내의 사회민주당을 분열시켜 공격하는 정책을 펼쳤다. 1921년 레닌이 새로운 국제 정세에 조응하여 전략적 전환을 시행할 즈음엔, 레닌의 관점에 따라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코민테른에서 레닌이 제기한 민족식민지 문제의 이론과 전략을 꾸준히 선전하면서,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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