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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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부하린

 

트로츠키 등 반대파에 대한 당내 투쟁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를 주요 정적으로 보고 투쟁에서 스탈린을 지지하면서 ‘트로이카’의 리더십 핵심을 구성했다.

 

이 리더십의 핵심은 겉으로는 단결했지만, 실제로는 공통적인 계산 외에 개개인의 추구를 중시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1883년에 태어났으며, 1901년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으며, 1936년에 총살되었다. 그들의 관점은 비슷하고 논쟁은 거의 없고, 일반적으로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둘 다 글을 잘 쓰고 연설을 잘했다.


양자를 비교하면, 지노비예프는 카메네프보다는 조금 더 명성이 높았다. 지노비예프는 장기간 당내에서 요직을 맡았을뿐만아니라, 또 7년(1919~1926년) 동안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코민테른의 많은 결의문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일찍이 자신이 쓴 많은 글을 문집과 소책자 형식으로 출판하려 하였다. 1923년부터 이미 <지노비예프 문집>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18권을 출판할 예정이었으나 모두 출판하지는 못하고 9권까지만 출판  한 후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외국에서 망명자로 사는 기간과 10월 혁명 이후 레닌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심지어 모두들 그를 "레닌의 가장 친밀한 조력자이자 대리인"이라고 여겼다. 바로 이 때문에 지노비예프 자신은 늘 허영심과 강렬한 공명심을 나타내고, 종종 당의 지도자로 자처하기도 했다. 12차 당대회가 소집될 때 레닌이 중병에 걸려 대회에 참석할 수 없어 정치보고를 하지 못했다.  대회의 정치 보고를 누가 할 것인지, 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모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추천했다. 이 제안은 정치국 위원인 리코프, 칼리닌, 카메네프의 지지를 받았지만 트로츠키 본인이 거절했다. 트로츠키는 역으로 스탈린이 할 것을 제안했지만, 스탈린 역시 거절했다. 그리하여 스탈린 등은 다시 지노비예프를 추천했다. 지노비예프는 조금도 사양치 않고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13차 당대회의 정치 보고 역시 지노비예프에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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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비예프


지노비예프는 여러 가지 우수한 품성을 갖고 있었지만 결점도 많았다. 그의 기분은 때로는 비정상적으로 낙관적이었다가, 다른 때는 의기소침해 지고 심지어는 ‘심지’가 약해서 긴급한 순간이나 전환의 고비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카메네프의 지명도는 지노비예프보다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내의 각종 미묘한 업무를 잘 처리하였다. 지노비예프에 비해 그의 지식은 더욱 해박하고 기초가 있었으며, 상당히 높은 이론적 개괄 능력을 지니고 있어 과감한 말을 할 줄 알았다. 레닌이 생존했을 때 그는 레닌의 인민위원회의 조력자로서 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인민위원회의 회의를 주재하였고, 여러 차례 당대회와 정치국 회의를 모두 그가 주재하였다.  하지만 그의 단점 또한 매우 분명했다. 쉽게 흥분을 하고, 어떤 결단을 빨리 내릴 수는 있지만 빨리 뒤집을 수도 있었다. 지노비예프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순간에 주관이 부족하고 애매모호하였다. 개인의 목적, 야망, 명망을 항상 우선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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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카메네프.  당시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및 정치국 위원


레닌이 살았을 때부터 스탈린과 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스탈린이 총서기가 된 후 점차 '무한 권력'을 장악해가자, 권력욕과 지도자 욕구가 강한 지노비예프를 불안케 했다. 그래서 1923년 7~8월 사이에 그는 코카서스 로보츠크에서 휴양할 때 그곳에서 휴양하는 일부 중앙위원들과 모임을 가졌다. 정치국을 없애고 서기처를 개편하여 정치화한 후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세 사람으로 구성된 지시를 발포하는 최고기관을 설립하려 했다. 지노비예프는 이를 통해 스탈린의 권력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그것은 리코프, 칼리닌, 톰스키, 몰로토프, 부하린이 당을 이끌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동굴'에 있는 사람들이 만든 정강이라 비꼬았다.(스탈린전집 7권, 324쪽) 스탈린이 14차 당대회에서 보고한 이 5명의 이름은 <스탈린전집>에 기재될 때는 리코프, 톰스키, 부하린 등 3명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은 <레닌주의 기초에 관하여>에서 레닌주의에 대한 지노비예프의 정의를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채 비판하였다. 1924년 6월 17일, 스탈린은 러시아공산당 중앙현(縣)당위원회 서기 훈련반에서 <러시아공산당 제13차 대표대회에 관한 총화>라는 보고를 하면서 ‘트로츠키 반대파’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이론문제에 무관심하다"고 지명  내지 직접 지명하지 않은 채 비판했다. 카메네프가 레닌의 ‘신경제정책(NEF)’의 러시아를 ‘네프만의’ 러시아로 왜곡했다며 비판했다. 스탈린은 또 지노비예프의 '당 독재' 개념을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 독재로 바꾼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스탈린전집 6권, 224~225쪽)


실제로 다음은 12차 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결의 중의 표현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선봉대, 즉 공산당의 독재의 형식을 취해야만 보장 받을 수 있다."* 당시 당의 다른 일부 지도자들도 이 표현을 사용했다. 예컨데 부할린은 1924년 중앙위원회 1월 전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임무는 두 가지 위험을 주시해야 한다. 첫째 우리 기관으로부터의 집중제 위험이다. 둘째 정치 민주화의 위험이다. 민주주의가 극단으로 가면 이 같은 위험이 발생한다. 반면 (트로츠키) 반대파는 한 가지 위험인 관료주의만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관료주의의 위험 뒤에 숨어 있는 정치 민주화의 위험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멘슈비즘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려면 당의 독재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라딕은 "우리는 소부르주아 국가에서의 독재당"이라고 덧붙였다. ** 하지만 스탈린은 12대 결의안의 이 표현이 부주의로 인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 <소련공산당 당대회, 대표회의 및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결의 집성> 제2분책 , 251쪽.

** 볼코고노프, <승리와 비극>1권, 205쪽.


스탈린이 현당위원회 서기 훈련반에서 한 연설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두 사람을 매우 불만스럽게 만들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회의에서 스탈린의 그들에 대한 공격을 토론하고 시비를 가릴 것을 요구했다. 회의는 스탈린의 이들에 대한 비난이 ‘비동지적’이며 "비판받은 사람들의 입장의 실체"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즉각 사임하겠다고 했지만, 카메네프는 지노비예프의 지원을 받아 그를 만류시켰다.

 

1924년 8월, 그루지야에서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일부 농민들이 여름에 심한 가뭄이 발생하여 농업 작황이 엄중한 영향을 받은데다, ‘협상가격차’ 문제가 심각해서 현행 경제정책 중 주로 가격정책에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이 농민폭동은 비록 진압되긴 했지만, 많은 생각할 만한 문제를 남겼다. 농촌에 대한 당 정책을 조정하고, 공업과 농업 제품의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가격정책을 수정하는 일이 시급해 보였다.


1924년 10월 21일에서 24일까지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농촌 당지부 서기(책임자) 회의를 소집했다. 스탈린은 회의에서 <농촌에서 당의 당면 과제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그루지야 농민폭동의 교훈을 요약하면서 "농민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소비에트를 활성화하고, 농민대중의 정치적 열정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부하린은 농민들에게 더 많은 특혜를 주고, 부유한 농민들에 대한 적대감과 제한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지노비예프는 농민들에게 소비에트 중의 더 많은 실질적 관리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잘 몰랐다. 이어 25일~27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는데,  농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바로 이때 트로츠키가 <10월의 교훈>을 발표했다. 당내에서 또다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됨으로써, 잠시 농촌 정책을 토론할 틈이 없게 되었다. 스탈린과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의 기존 각종 이견과 갈등은 이로인해 일시적으로 확대되지 않고, 그들은 다시 동맹을 맺고 트로츠키에 대응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 또 다른 갈등을 겪었다.


‘트로츠키 반대파’가 패배한 뒤 당 중앙은 농촌 경제정책 문제에 대한 논의에  다시 착수했다. 부하린은 신경제(NEP)정책은 장기적 정책이라면서 "우리의 정책은 1년이 아닌 수년간의 정책을 실행하는 계획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정책(NEP를 지칭-주)은 각종 경제역량, 각종 경제 성분이 서로 번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현재 "우리는 도시에 새로운 경제정책이 있으며, 도시와 농촌 관계 측면에서 새로운 경제정책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농촌과 수공업 방면에 새로운 경제정책이 거의 없다." 그중 관건은 농민에게 있다. 반드시 농민경제와 공업 간의 결합점을 찾아야만 한다. 공업을 신속히 발전시키고 그 발전을 위한 자금을 축적하려면, 반드시 먼저 농민경제의 발전을 가속화해야 한다. "농민의 지불 능력이 있는 수요(유효수요)가 클수록 우리의 공업 발전은 더욱 빨라진다."*

 

*<부하린문선>(상권), 인민출판사 1981년판, 368, 422~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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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린

 

그는 아주 간결하고 명료한 유명한 말로 그의 생각을 표현했다.  "전체 농민에게, 농민의 모든 계층에게 말해야만 한다. 부자가 되라, 축적하라, 자신의 경제를 발전시켜라! 바보만이 우리가 영원히 가난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정책은 우리나라에서 빈곤을 없앨 수 있는 정책이어야만 한다."(위의 책, 426쪽) 농민경제의 발전 경로에 대해서 부할린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 발전의 길은 레닌이 강조한 ‘협동조합’이다. 한편으로는 상품의 유통을 개방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 관계를 통해서 농민 경제를 사회주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에서 협동조합의 성장은 실질적으로 사회주의의 성장을 의미한다"라는 레닌의 중요한 결론을 재확인했다. 부농경제는 결코 두렵지 않다. 그것은 평화롭게 사회주의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위의 책, 368쪽)

 

1925년 4월 27~29일에 열린 러시아공산당 제14차 당대회에서 발언할 때 부하린은 다시 그의 입장을 강조했다. 스탈린, 몰로토프, 리코프 등이 부하린의 견해에 대해서 지지를 표시했다. 회의는 농촌 정책에 대해 진일보한 연구 및 수정을 하였고, 상응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를 전후해 소련 당과 정부 또한 개인경제 발전을 장려하기 위한 법령을 공포하였다. 농업정책에서도 일부 신경제정책을 발전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예컨대 토지임대, 고용, 자본축적에 가해진 제한 조치를 대부분 취소하였다. 마을공동체가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공업과 농업제품의 가격을 조정하고, 농업세를 낮추고 공업품의 가격을 낮추어 농촌 교역조건을 개선하였다. 농업에 대한 국가의 투입을 증가하고, 대출의 제공과 농업 기계의 공급을 증가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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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 차 당 대회에 참석한 스탈린. 왼쪽부터: 라셰비치, 프룬제, 스미르노프, 라이코프, 보실로프, 스탈린, 스크렙니크, 부브노프, 오르드조니키제 (1925)

 

그러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 부하린 등이 취한 이런 정책과 조치에 결연히 반대하며 그들과 불협화음을 나타냈다. 그들은 먼저 부하린을 공격하면서 그의 관점을 “부자가 되라”는  글자로 요약했다. 그러면서 그를 부농의 대변자라고 규정하고, 중앙의 정책이 '부농 성향'이라 비난하며 여전히 중농을 중립화하는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크루프스카야 또한 자신의 글을 통해 부하린의 구호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부하린은 자신의 구호를 변호하기 위한 글을 썼다. 스탈린 등은 이들 두 사람의 글이 게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부하린이 신문에 “부자가 되라”는 구호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하여 부하린은 신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성명을 내야 했다.


제14차 당대회가 끝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스탈린은 러시아공산당 모스크바 조직 활동가 회의에서 <러시아공산당 제14차 당대회의 업무 요약>이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스탈린이 모스크바당 당조직에서 보고를 하기로 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주석이 카메네프이고, 모스크바 당조직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보고를 하기로 한 것은 그곳 조직에 대한 카메네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스탈린은 보고에서 농촌에서의 당 정책은 전시공산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고, 중농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주위에 단결시켜 "농민경제를 소비에트 경제발전의 총 체계에 편입시키는 것"이라 지적했다. 농촌의 낡은 행정관리 방법과 지도 방식을 점차 제거하고,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원칙을 확립하며, 농민들의 경영의욕을 보호하여야 한다. "이런 적극성을 합작사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이 같은 적극성이 합작사를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합작사를 통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보고에서 트로츠키의 많은 저서를 열거하며 "세계혁명을 통해야만, 세계혁명에 의거해야만"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농민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고, 종국에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관점은 "레닌주의와 전혀 공통점이 없다"라고 다시 한번 그를 비웃었다. 스탈린은 또한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관점을 명확하게 논증했다. 즉, 한 나라가 자신의 힘을 통해서 본국에서 사회주의경제를 조직하고, 최종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외국의 무장간섭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비록  한 나라가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 나라와 자본주의국가 간의 모순을 극복할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 모순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국제적 범위에서 몇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의 공동의 노력을 통하거나, 혹은 더 좋게는 여러 나라의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장간섭을 면할 수 있는 완전한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즉 사회주의의 최후 승리를 거둘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스탈린은 이미 <레닌주의 기초에 관하여>"에서의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수정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스탈린전집> 7권, 91-108쪽.


스탈린 등의 작업은 효과적이어서 모스크바 당 조직은 곧 중앙 다수파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역시 만만치 않았다. 1925년 가을, 카메네프가 당의 모스크바 위원회에서 보고할 때 중앙 정부가 부농의 위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여전히 비난했다. 그는 부농의 14%가 잉여 곡물의 61%를 손에 쥐고 있다면서 흥미로운 수치를 제시했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 농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중농이 아니라 부농이라고 간주했다. 카메네프의 이 숫자는 분명 과장된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 중농이 대다수를 차지했는데, 순수 부농은 전체 농가의 약 3%에 불과했다.

 

지노비예프도 [프라우다]에 <시대철학>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중앙의 정책을 비난했다. 그는 '당의 퇴락'을 막겠다는 구호를 내걸며 중앙 다수파에 도전했다. 9월 12일, 휴가 중이던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지노비예프의 <시대철학>을 거칠고 혹독하게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스탈린은 나중에 자신이 "이 글을 거칠게 비판한 것은, 지노비예프가 1년 동안 농민 문제에 있어 레닌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일관되게 말살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위의 책, 313-314쪽)


바로 이  9월에 지노비예프는 <레닌주의>라는 책을 출간했다. 레닌의 저술에 익숙한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레닌의 저술 인용문을 대거 인용하면서, 한 나라가 사회주의 혁명은 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 제도는 한 나라에서 최종 승리할 수 없다. 세계사적 의미의 사회주의 승리는 국제무대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적어도 몇 개 결정적 국가에서 승리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승리이며, 그것이 공고하고 궁극적인 승리다." 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신경제정책(NEP)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아닌 계속된 퇴각이라고 간주했다. 즉 비록 전시공산주의에서 퇴각하긴 했지만, 이는 사회주의를 향한 퇴각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 특수한 국가자본주의로 퇴각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어떤 위험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의 계급투쟁을 은폐하고, 부농의 위험을 말살하며, 레닌이 우리나라 제도에서 국가자본주의와 일반자본주의에 대해 서술한 여전히 올바른 논술을 말살하고 있다”.*

 

* 지노비예프, <레닌주의>, 동방출판사 1989년판, 183, 227, 243-244쪽.


1925년 10월에 소집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소콜리니코프, 크루푸스카야는 연명으로 중앙에 편지를 써서 당의 현행정책을 재심사하고 토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원회의에서 다수는 당내 논쟁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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