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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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스탈린 (1878.12.18.~1953.3.5)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은 스탈린 시절에 창립되었다. 실사구시적으로 스탈린의 생애를 소개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스탈린과 그가 개척한 소련 사회주의 모델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련과 동구의 격변, 소련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은 다양하지만, 국제사회주의운동의 경험과 교훈을 총괄하려면 반드시 객관적 태도로 스탈린 시기에 건설된 소련 사회주의 모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스탈린에 대한 연구는 한 개인의 전기를 기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그를 통해서 과거 현실사회주의의 성과와 한계, 실패의 원인을 찾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로, 본 연재는 중국 다이롱빈(戴隆斌)의 저서 <스탈린전기> (인민일보 출판사 2009년판)에 기초하였다.  편의상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발발 시점부터로  연재를 시작한다.
 

 

 

제1장 세계를 뒤흔든 날들

 

제1절 격동을 인식하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이 승리하자 먼 시베리아의 유배자들은 마침내 희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정치범에 대한 대사면 소식을 접한 그들은 마음속의 흥분을 억제하지 못했다. 대사면의 정식 증명서를 받기도 전에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 블리스, 바쿠 및 기타 중심 도시로 가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곳에서 투신할 준비를 했다. 

 

스탈린은 무라노프, 카메네프 등 유배자들과 함께 3등칸 기차표를 구해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향했다. 그는 창밖의 광활하게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설원을 탐욕스럽게 바라봤다. 이곳은 일찍이 그의 여러 해의 귀중한 시간을 소모케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의 마음속에 낙담과 번민을 남겼지만, 이제 그는 자유롭게 혁명의 용광로 속에 뛰어들어 큰 솜씨를 발휘할 것이다.

 

어느덧 기차가 우랄산맥에 도착하자, 서쪽으로 가는 역마다 떠들썩한 인파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이들 유배자들의 귀환을 환영했다. 도처에서 프랑스 혁명가 ‘라 마르세예즈’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즐거워 보였으며 끝없이 공연을 벌였다. 페름을 지날 때 스탈린, 카메네프, 무라노프 세 사람은 멀리 외국에 있는 레닌에게 전보를 보내어 이 지도자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레닌에게 자신들이 3월 8일에서 3월 12일 사이에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다. 3월 12일 그들은 예정대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당시 수도 페트로그라드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월 혁명 후 이중권력이 출현했는데, 그들은 모두 타우리다 궁전에 자리 잡고 끊임없이 회의를 개최했다. 

 

타우리다궁의 한쪽은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자리 잡았는데, 정부 각료 중 한 명 케렌스키(그는 임시정부에서 사법부 장관직을 맡았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자본가계급 출신이었으며, 그중 입헌민주당원들이 우세했다. 임시정부는 각급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있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타우리다궁의 다른 한쪽에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있었다. 소비에트는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러한 무장력 덕택에 실질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소비에트를 이끄는 사람들은 멘셰비키 활동가인 셰이저(N. S. Cheidze), 스코베레프(M. I. Skobelev) 등이었다. 

 

당시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소수파에 속했다. 이런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2월 혁명 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볼셰비키는 불법 상태였고 멘셰비키는 합법이었다. 멘셰비키는 자신들의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잘 활용했다. 또 볼셰비키당의 공인된 지도자인 레닌은 아직 외국에 있었다. 제르진스키, 스베르들로프, 무라노프, 부브노프, 루주타크, 스탈린, 오르제니키제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혹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이제 막 러시아의 혁명 중심지로 돌아오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멘셰비키가 우세를 점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는 자발적으로 정권을 부르주아 임시정부에게 양보했다. 자본가계급을 이용해야만 "짜르제도를 타도하고 국내에서 민주제도를 공고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의 감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는 연락위원회를 설치했는데, 그 목적은 "정부의 의도를 소비에트에 통보하고, 혁명적 인민의 요구를 정부에 통보하며 (중략) 정부가 이 요구들을 충족시키도록 인도하고, 이러한 요구의 실시에 대해 끊임 없이 감독을 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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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혁명


 하지만 레닌의 견해에 따르면, 이때 러시아 혁명은 이미 제1단계( 즉 민주주의혁명)를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이중권력이 병존하는 복잡한 국면은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켰으며, 개량주의적 분위기가 팽배케 하였다.

 

"용솟음치는 소부르주아계급의 물결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양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각성된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압도했다."* 형식적으로 볼 때, 모든 권력은 임시정부에 속한 듯 보였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는 혁명에서 허드렛일만 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어느 한쪽도 권력 전체를 장악할 수는 없었으며, 어느 쪽도 상대의 기능을 대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 레닌, <러시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임무>(1917년 4월 10일)

 

스탈린은 막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기에 이런 복잡한 사정을 잘 몰랐다. 그는 기차에서 내리자 그의 작은 가방을 들고 옛 지인인 세르게이 알리루예프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한 가족으로 대접받았다. 알리루예프 가족은 세르게이와 그의 아내 올가, 아들 페도르와 파빌, 두 딸 안나와 나타야 (Nadya, 나제슈다 알리루예바, 당시 16세, 후에 스탈린의 아내가 된다)가 있었다. 스탈린은 그들에게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연도의 각 역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환영하던 장면들을 생동감 있게 흉내 내 온 가족들을 깔깔 웃게 만들었다.

 

스탈린, 무라노프, 카메네프가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3월 12일, 볼셰비키 중앙러시아국은 회의를 소집해 그들 세 사람의 사업배치에 관해 토론했다.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무라노프, 스탈린, 카메네프 동지 문제를 해결토록 한다. 무라노프 동지에 대해선, 그가 중앙러시아국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스탈린의 경우, 모 동지가 그가 1912년 중앙의 대표였다고 보고했기에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참가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어떤 결점 때문에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그가 회의에 열석하는 대표로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카메네프에 대해선, 그의 심문사안*에서 보인 태도와 시베리아와 러시아에서 통과된 결의에 따라, 회의는 그가 만약 원한다면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일군으로만 참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그가 쓴 글은 자료로만 사용할 수 있고, 그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도록 했다."**

 

* 카메네프가 1915년 당내 재판을 받을 때 레닌의 <전쟁 문제에 관한 테제>를 비난하고 레닌과의 관계 이탈을 발표한 것을 가르킨다.
** 메드베데프의 "역사를 심판하라" 19~20쪽을 인용.

 

이튿날 중앙러시아국은 다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레닌의 <귀국길에 오른 볼셰비키에게 보내는 전보(電報)>(1917년 3월 6일)를 낭독했다. 레닌은 이 짧은 전보에서 "우리의 전략은 신정부(임시정부)를 일체 신뢰하지 말고, 신정부에 아무런 지지도 주지 않는 것"이라면서 "다른 당파와는 다르게 접근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4] 회의는 오리민스키, 스탈린, 예레메예프, 칼리닌, 마 이 울리야노바(Ma Yi Ulyanova)로 [프라우다] 편집부를 구성할 것을 비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서 스탈린은 볼셰비키 중앙러시아국의 정식 회원으로 승인됐다.

 

[프라우다] 이 볼셰비키의 합법 신문은 1912년 창간된 후 여러 차례의 부침을 겪었다. 몇 번이나 제정러시아 당국에 의해 차압되거나 폐간조치를 받았으며, 그때마다 명칭을 바꾸면서 출판되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 7월 마지막 폐간 명령을 받았는데, 2월 혁명 발발 후인 1917년 3월 5일에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복간되었다.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몰로토프가 편집장을 맡았다. 스탈린은 [프라우다] 편집부에 배치되자 알리루예프의 집에서 나와 신문 편집 일에만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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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

 

3월 15일 [프라우다]는 자신의 편집부 성원은 스탈린, 카메네프, 무라노프라고 공표했다. 중앙러시아국이 이틀 전 결정한 기타 성원들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이에 대해 중앙러시아국은 3월 17일 오리민스키가 제출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에서 "중앙러시아국과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카메네프를 편집부에 억지로 끌어들인 것에 항의하며, 그에 대한 이런 처사와 그의 [프라우다] 편집부 참석 문제에 대해 조만간 열릴 당 대회에서 논의할 것이다"*라고 성명했다.


* 메드베데프, "역사를 심판하라", 20페이지

 

카메네프는 1917년 4월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제7차 전국대표회의(일명 ‘4월 대표회의’)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10월에는 정치국 위원이 됐다. 이 때문에 그의 [프라우다] 참여 문제도 흐지부지됐다.

 

원래 중앙러시아국은 카메네프에게 글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는데, 사실상 이것 역시 지켜지지 못했다. 카메네프는 손이 매우 빠른 사람이었다. 3월 14일과 15일 <임시정부와 혁명적 사회민주당>, <비밀외교 하지 말라>는 제목의 두 편의 글을 연속으로 [프라우다]에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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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1883.7.6 ~ 1936.8.25.)

 

카메네프는 위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은 임시정부를 지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낡은 제도의 잔재들과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군대가 전쟁을 진행한 이상 혁명적 인민들은 "일자리를 고수하고, 총탄은 총탄으로, 포탄은 포탄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이는 분명 레닌의 방침과 저촉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카메네프의 글이 발표되는 것을 지지했고, 카메네프의 이 같은 반(半)멘셰비키적 견해에 대해 반격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스탈린 자신도 3월 16일 [프라우다]에 실린 <전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노골적으로 '전쟁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실제적인 방법으로 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부적절하다"면서, 전쟁을 중단하려면 "그 출로는 임시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임시정부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평화협상을 시작하는데 동의토록 해야한다."고 썼다. 

 

스탈린은 1917년 3월 27일~4월 2일 볼셰비키가 소집한 ‘전러시아 당 일꾼 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에 관한 보고를 했다. 거기서 "임시정부가 혁명을 공고히 하는 절차를 취하는 한 그것을 지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반혁명적이라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라고 발표했다. 현재 "임시정부는 사실상 혁명적인 인민의 성과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임시정부에 대해 지지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의에서 스탈린은 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두 파벌의 통일에 찬성하고, 볼셰비키가 "너무 멀리 앞서 나가 미리 이견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중략) 우리는 하나의 당내에서 작은 이견들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 <전 러시아 (3월) 당 일꾼대표 회의록, 1917년 3월 27일-4월 2일>, ≪소련공산당 역사문제≫ 1962년 제5호.

 

이 회의에서 멘셰비키와 연석회의를 열기 위해 스탈린, 카메네프 등 4명을 선출하여 대표단을 구성하였으며, 멘셰비키와 연대하는 문제에 관한 협상을 추진키로 결정했다. 협상은 곧 시작되었는데, 4월 레닌이 해외에서 귀국한 후라야 중단되었다.

 

전쟁, 임시정부, 그리고 볼셰비키가 멘셰비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에 있어서 당시 스탈린은 분명 레닌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레닌은 임시정부에 어떠한 지지도 보내지 말며, 어떤 파벌과 "어떠한 동맹, 어떠한 연합, 심지어는 협의조차 체결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  레닌, “1917년3월4일 테제 초고”

 

하지만 스탈린과 카메네프 등은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레닌의 사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는 레닌이 스위스에서 [프라우다]에 기고한 <먼 곳에서 온 편지> 시리즈를 모두 게재하는데도 동의하지 않았다. 첫 편지만 발표하는데 동의했고, 나머지 세통의 편지는 게재되지 않았다. 그리고 첫번째 편지도 [프라우다] 편집부에 의해 약 5분의 1 가량이 삭제되었다. 주로 레닌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자도자들이 타협주의 입장을 취한데 대한 비판, 임시정부가 계속 전쟁을 수행하려는 제국주의 의도에 대한 폭로 부분이 삭제당했다. 

 

[프라우다]의 이 같은 입장은 레닌이 귀국 후 편집부에 참석한 뒤에야 비로소 바뀌었다. 스탈린은 1924년 11월 전소련 노동조합 중앙이사회 공산당 프랙션 전원회의에 참석하여 연설하면서 자신의 이 같은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화조약 문제에 있어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에 압력을 가하라는 입장을 취했고, ‘프롤레타리아-농민 독재’라는 낡은 구호를 버리고 ‘소비에트 정권’이라는 신구호의 채택을 결정하지 못했다. (중략) 이는 평화주의적 환상을 키우고 호국주의를 도왔으며, 대중에 대한 혁명적 교육을 방해했기 때문에 대단히 잘못된 관점이다. 당시 나와 당내의 다른 동지들은 이 같은 잘못된 입장에 대해 찬성했다. 다만 4월 중순에 레닌의 테제에 동의한 후라야 이런 입장을 완전히 버릴 수 있었다."*


*  스탈린 전집 6권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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