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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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소속 병사들의 회의 모습

 

10월의 나날은 긴장되었다.
10월의 길은 기복과 우여곡절로 가득 차 있었다.

 

8월 25일, 전 짜르 장군이자 현 임시정부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인 코르닐로프가 총구를 돌려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케렌스키 총리를 포함한 임시정부 전체 성원의 사임, 군사와 민간 업무를 포함한 모든 권한을 최고총사령관인 자신에게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군사 반란에 직면하여 수도 전체는 공포에 떨었다. 원래 케렌스키는 볼셰비키와의 최후 결전을 위해 코르닐로프를 사주해 수도에 믿을 만한 군대를 보내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코르닐로프의 개인적 야심이 너무 컸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의 총사령관직을 해임한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직접 볼셰비키에게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설득해 "혁명을 보위"하도록 권유할 것을 요청했다. 이 같은 생사의 긴급한 상황에 즈음해 모든 사회주의 파벌은 연합했고, 반란은 곧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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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닐로프

 

이 사건을 계기로 혁명에  있어 새로운 전환이 생겨났다. 레닌은 이것이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소비에트에 책임을 지는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시했다. 볼셰비키는 이를 위해  "정부 참여를 요구하지 않는다", "즉시 정권이 노동자계급과 빈농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혁명적 방법을 통해 이를 실현하지 않는다."라는 양보안을 제시했다. 단, 조건으로 볼셰비키는 "선동의 충분한 자유를  갖는다" "더 이상 제헌의회 소집 날짜를 연기하지 않고,  짧은 기간 내에 소집한다."라는 두 가지를 제안했다.  이 제안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의해 거부되었다.

 

코르닐로프 반란을 분쇄한 후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전례 없이 확대되었다. 수도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지의 소비에트의 주도권은 볼셰비키에게 넘어갔다. 이 같은 새로운 형세에 입각하여 볼셰비키는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제시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지도자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은 소비에트 정당, 협동조합 및 자치기관의 대표를 포함하는 민주 정부를 수립키 위해 ‘전러시아 민주회의’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9월 14일부터 22일까지 페테르부르크에서 전러시아민주회의가 열렸다.

 

일찍이 이 민주회의가 개막되기 전인 9월 12~14일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볼셰비키는 권력을 탈취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봉기>라는 제목의 두 통의 편지를 썼다. 이들 편지에서 레닌은"지금의 민주회의는 혁명적 인민의 다수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협적인 소부르주아지 계급의 상류층 분자만을 대표할 뿐이다"라면서 "우리가 만약 민주회의를 '의회'로 대우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되며, 완전한 ‘의회의 미궁’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의 임무는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지역의 무장봉기, 정권 탈취, 정부 전복 문제를 실제 일정에 올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합법적인 상태에 있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대부분은 민주회의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고 있었다.  스탈린도 그러했다. 9월 14일에 쓴 <민주회의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그는 회의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으며 그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첫째는 “회의가 모든 것에 불구하고 정말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반드시 탈취한 혁명적 권력을 조직하는 일에 대해 언급해야 하며 또한 언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회의가 권력을 '탈취'하지 않고 케렌스키와 단절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정권 조직에 대한 논의는 쓸데없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어제 입헌민주당과의 연합을 거부했으며, 혁명의 길을 택할 계획"이라면서 "혁명정권의 싹은 아마도 이 회의에서 형성될 좌익"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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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7월 임시정부 총리를 맡은 케렌스키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9월 15일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위 두 통의 편지를 논의하기 위한 특별 회의를 소집했다. 카메네프는 회의에서 레닌이 제안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에 대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 발언할 때 우물쭈물하며 가부를 말하지 않은 채, 레닌의 편지를 당 조직에 보내 토론할 것을 제안했다. 회의는 카메네프의 제안을 부결시키고, 이후에  '전략 문제'를 다시 논의키로 했다.

 

 레닌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민주회의'에 대표를 파견키로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다. 9월 20일, 민주회의 의장단은 결의를 통과시켜 민주회의 성원들 가운데 그 대표자 수 15% 비율로 공화국 민주회의 (즉 예비국회) 를 구성하여 의회기능을 수행키로 했다. 이는 사실상 민주회의에서 적은 수인 볼셰비키를 의회 구성에서 밀쳐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불참한 상태에서 볼셰비키 중앙은 여전히 예비국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9월 17일부터 23일 사이에 레닌은 <위조된 영웅과 볼셰비키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글을 써 볼셰비키 중앙의 민주회의에 대한 심각한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볼셰비키는 결코 이런 명백한 무의미한 일을 해서는 안 되며, 날로 고조되는 혁명을 약화시키기 위한 무료한 속임수로 인민을 속이는 명백한 사기극에 자신을 얽매이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볼셰비키는 원래 민주회의에서 퇴장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가 혁명적 ('입헌적'이 아닌)으로 긴요한 결정적 순간에 의회 활동에 대해, 그리고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에 대해 옳지않은 태도를 취했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스탈린이 지도하는 중앙기관지 <노동자의 길>은 9월 24일 레닌의 글을 발표하면서 이런 내용들을 통째로 삭제했다.

 

레닌은 분개했다. 9월 29일, 그는 <위기가 성숙했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나의 글 중 볼셰비키가 예비의회에 참가하는 수치스러운 결정을 내렸다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 그리고 소비에트 의장단의 의석을 멘셰비키에게 양보하는 등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적한 부분을 중앙기관지가 삭제한 점을 감안할 때, 나는 이것이 '미묘하게' 중앙위원회가 심지어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미묘하게'는 나의 입을 막고, 나를 물러나게 하려 는 것을 암시한다."

 

레닌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를 향해 잘못을 바로잡고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온 힘을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의 이 글은 "중앙위원회, 페테르부르크위원회, 모스크바위원회 및 소비에트의 성원들에게만 배포"되도록 명확히 밝혔지만, 이들 성원들은 즉각 과단성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10월 1일 레닌은 다시 상술한 각 위원회와 소비에트 내의 볼셰비키 위원들에게 편지를 써 "지연은 범죄"라고 지적하면서, 볼셰비키에게 기다리지 말고 "즉시 봉기를 거행해야 한다", "즉각 정권을 탈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레닌의 거듭된 촉구하에 당 중앙위원회는 10월 5일 회의를 소집하고 레닌의 건의를 토론하였다. 회의는 카메네프, 리코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비국회에서 탈퇴하는 결정을 내렸다. 10월 7일 예비국회가 개막되는 날, 볼셰비키는 회의에서 성명을 낭독한 후 예비국회에서 물러났다.

 

10월 7일, 레닌은 비밀리에 비보르크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무장봉기에 관한 논의를 위한 회의를 열었다.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트로츠키,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등이 회의에 참석했다.  스베르들로프가 회의를 주재했다. 레닌은 회의에서 현 정세에 관한 보고를 했고, 레닌이 제시한 결의안을 회의는 찬성 10표, 반대 2표로 통과시켜 무장봉기에 관한 즉각적 준비를 의제로 삼았다.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회의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트로츠키, 스탈린, 소콜리니코프, 부브노프 이상 7명으로 구성된 정치국을 구성해서 봉기에 대한 정치적 지도를 하기로 결정했다.

 

10월 11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중앙에 성명서를 제출하고 당의 지방조직에는 <현 시국에 관하여>라는 편지를 써 자신들이 즉각적인 무장봉기를 거행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지지를 받지 못했다.

 

무장봉기 준비사업을 순조롭게 전개하기 위하여 10월 12일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 내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기구는 명목상 페테르부르크 군구 활동과 수도의 방어 업무를 감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볼셰비키의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공개 지휘부였다.

 

10월 16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볼셰비키당)는 확대회의를 열었는데,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여기서도 다시 무장봉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반박했다.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발언을 통해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제안은 객관적으로 반혁명을 준비하고 조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끝없이 퇴각해 혁명을 패배하게 할 것"이라면서 지노비예프의 잘못을 비판했다. * 회의는 레닌의 결의안을 찬성 19표, 반대 2표, 기권 4표로 통과시켰다. 지노비예프가 제안한 결의안은 찬성 6표, 반대 15표, 기권 3표로 부결되었다.

 

*<스탈린전집> 3권 366쪽, 인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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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스탈린 (1917년)

 

이어진 중앙위원회 비밀회의에서 부브노프, 제르진스키,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우리츠키로 구성된 봉기 지도기관인 군사혁명본부가 출범했다. 중앙위원회의 결의문은 구체적으로 당의 군사혁명본부 위원들이 동시에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라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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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제르진스키

 

10월 18일 카메네프는 준 멘셰비키 신문인 <노바야 지즌>(신생활보)에 자신과 지노비예프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행동 개시 문제가 논의를 서두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나와 지노비에프 동지는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핀란드에 있는 우리 당 각 조직에 편지를 써 최근 우리 당이 시작한 모든 무장 행동을 개시하는 것에 대해 결연히 반대한다고 밝힌다.",  "나와 지노비예프 동지뿐 아니라, 또 많은 실제 업무에 종사하는 동지들은 현재 지금의 사회 세력 대비 하에서 소비에트대회를 제쳐두고,  그것이 열리기 며칠 전에 주동적으로 봉기를 일으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노동자계급과 혁명에 대한 극단적인 위험한 절차라고 생각한다."* 라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당의 무장봉기 기밀을 누설한 셈이다.

 

* <레닌전집> 2판 32권 , 366쪽,  인민출판사.

 

레닌은 이에 대해 분개해 당일 <볼셰비키당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후, 다음 날에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 두통의 편지에서 레닌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행위를 ‘반노동자적’이라고 규정하며 그들을 당에서 제명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19일, 지노비예프는 <라보차야>(노동자의 길)에 레닌의 비난을 반박하기 위한 짧은 편지를 썼다. 다음날 스탈린은 당 중앙과 신문 편집위원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지노비예프의 이 편지를 발표하면서 ‘편집자 주’를 달았다.

 

"우리는 지노비예프 동지가 낸 성명(그리고 카메네프 동지가 소비에트에서 한 성명)을 감안할 때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희망을 표시한다. 레닌 동지 기사의 날카로운 어조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여전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로버트 슬라세, < 1917년의 스탈린>, 모스크바진보출판사 1989년판, 262페이지.

 

스탈린이 지노비예프의 문자메시지를 발표한 날(10월 20일), 볼셰비키당 중앙은 레닌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편지> 단독 토론하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릴 준비를 했다. 레닌도 당시 페테르부르크에 있었지만 여전히 수배 상태여서 회의에는 참석치 않았다. 이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당 기관지가 지노비예프의 편지와 서명이 없는 '편집자 주‘를 발표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면서, 카메네프의 중앙위원 사퇴 요청은 승인돼야 한다고 발언했다.

 

제르진스키(Dzerzhinsky)는 카메네프를 정치활동에서 완전히 퇴출시킬 것을 제안함과 함께, 지노비에프는 원래 줄곧 지하상태에 있어 당 사업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양자는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카메네프의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옳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중앙위원회가 비록 당원을 제명할 권리는 없지만 문제는 지금 즉각 해결되어야 하며, 중앙위원회 회의는 충분한 권위가 있다. 레닌의 성명과 중앙위원회 탈퇴에 관한 카메네프 성명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며, 카메네프의 사직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스탈린도 회의에서 연설했다: 레닌 동지의 제안은 전원회의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현재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제안한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복종할 것이며, 제명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며 당의 통일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에게 중앙의 결정에 복종하고, 그들을 중앙위원회에 머물도록 명령할 것을 건의했다.

 

회의는 스탈린이 독단으로 지노비예프의 편지를 발표하고 '편집자 주'를 단 것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회의에 <라보차야(노동자의 길)> 편집진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회의는 그의 사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성명도 토론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그에 관한 문제는 편집부 내에서 토론하여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회의는 토론을 거쳐 카메네프의 중앙위원회 탈퇴 사표는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중앙위원회의 결정과 중앙위원회가 채택한 노선에 반대하는 어떤 성명도 발표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레닌은 중앙의 이러한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종의 타협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10월 22일(또는 23일) 스베르들로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문제에서 당신들 (스탈린, 소콜리니코프, 제르진스키)이 타협을 원한다면,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건의를 해 달라. 즉 이 일을 당의 법정 심리에 맡겨라. (사실관계는 명확하다. 지노비예프도 고의로 파괴한 적이 있다.) 당신들의 이런 처리 방식은 장차 시간을 지연시킬 것이다.”*

 

* <레닌전집> 2판 32권, 429쪽, 인민출판사.

 

그러나 스탈린의 이 같은 절충도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무장봉기라는 절대절명의  중요한 순간에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사람, 특히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처럼 당내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필요했다. 게다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도 곧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10월 무장봉기 준비작업에 직접 참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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