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등록일 : 202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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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저녁 9시에 레닌, 지노비에프 등은 독일과 스웨덴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왔다. 환영 인사 중에는 카메네프, 콜론타이, 스탈린, 라스콜리노프, 슐랴프니코프(Shlyapnikov) 등이 있었다. 레닌은 환영하는 군중에 둘러싸여 역에서 짧은 연설을 한 후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벨로스트로프에서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길에 레닌은 그를 환영하는 동지들과 당의 상황을 논의했다. 동시에 그는 <프라우다>에 실린 카메네프의 기사에 대해 심각하게 비판했다. 그가 글에서 사실상 임시정부를 지지한 것이며, 전쟁에 대한 견해에서 호국주의 입장으로 미끄러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저녁 11시에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도착한 체이제와 스코벨레프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공식 대표 신분으로 레닌을 환영했다. 체이제가 짧은 환영사를 낭독한 후, 레닌은 즉석에서 러시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군에 경의를 표하고, 그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싸울 것을 촉구했다.

 

이 역에서 스탈린은 이미 몇 가지 문제에 있어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중에 그가 회상했듯 4월 3일 밤에 "많은 문제가 훨씬 더 명확해졌다"고 느꼈다. 다음날 그는 타우리다궁에서 레닌의 연설을 들었는데, 그후 ‘4월 테제’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10개 항목의 개요였다. 

 

레닌의 이 연설은 4월 7일 <프라우다>에 발표되었다. 다음날인 4월 8일 카메네프는 <프라우다>에 글을 써 레닌 노선에 격렬히 반대했다. 스탈린은 공개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의 지지가 없었다면 <프라우다>는 카메네프의  글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의 스탈린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사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눈앞의 각종 주장에 직면해서 그는 선택하려 노력했다. 4월 중순 이후 스탈린은 점차 자신의 기존 생각을 버리고 레닌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농민에게 토지를"(4월 15일)과 바실리섬 거래소 광장에서 열린 '노동절' 군중대회 연설 "임시정부에 관하여"(4월 18일)에서 그는 이미 임시정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노동자와 병사는 그들 자신이 선출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라고 그는 호소했다.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제7차 전국대회(일명 ‘4월 대회’)에서 스탈린은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표명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민족문제에 관한 보고를 했다. 이 회의에서 레닌의 노선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는데, 스탈린은 9인의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

 

6월 3일부터 24일까지 페테르부르크에서 ‘제1차 전(全)러시아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회의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총회에 출석한 의결권 있는 대표는 모두 822명이었는데, 그중 볼셰비키 105명, 사회혁명당 285명, 멘셰비키 248명 등의 구성이었다. 대회에서 선출된 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 멘셰비키는 123명(후보위원 16명 포함)이 당선되었고, 사회혁명당이 119명(후보위원 18명 포함)을 차지한 반면, 볼셰비키는 57명(후보위원 22명 포함)에 불과했다. 회의에서 스탈린은 중앙집행위원회 정식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소비에트 대회 기간 중 군중들은 시위 행진을 준비했다. 6월 6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확대회의는 정세를 검토한 후, 6월 10일 오후 2시에 시위를 진행키로 결정했다. 회의에서 스탈린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평화적인 시위 조직에 관한 레닌의 제안을 지지했다. 하지만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장악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시위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때문에 볼셰비키는 대국적 관점에서 시위행진을 취소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항의의 표시로 당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 18일에도 페테르부르크 50만 명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0명의 자본가 장관 타도"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거리로 몰려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번 시위로 인해 임시정부의 위기가 드러났다(이것은 이미 두 번째 위기인데, 4월에도 한 번 나타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전선의 공세에 의해 중단되었다. 7월 4일, 50만 명이 넘는 병사와 노동자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입헌민주당,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으로 구성된 연합정부는 ‘질서 회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최전선에서 군대를 이동시켜 이 평화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임시정부는 수도에서 노동자들의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프라우다>를 폐쇄시켰다.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 소재지인 크셰신스카야 궁전을 강제로 점령한 후,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추적하는 한편 레닌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전국은 이제 백색 공포에 휩싸였으며, ‘이중권력’이 병존하는 국면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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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6월 18일 페테르부르크 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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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7월 4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대중집회가 임시정부 군대에 의해 총격을 받아 해산된 장면

 

레닌은 어쩔 수 없이 지하로 숨어들었다. 7월 7일 이른 아침, 레닌은 지노비예프가 숨어 있던 알릴루예프의 집에 숨었다. 레닌은 거기서 법정에 출두할지를 망설였다. 저녁에 스탈린, 오르조니키제 및 다른 사람들이 알리루예프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재판을 위해 법정에 출두"하라는 당국의 요청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다. 처음엔 의견이 엇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법정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가 명확한 보증을 해줘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토론이 한창 긴장되고 격렬하게 진행될 무렵, 나제슈다 알리루예바가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바깥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7월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잠수함을 타고 독일로 도주한 독일 간첩이라는 소문이 거리에 나돌고 있으며, 그중 주범은 레닌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전달한 길거리 뉴스 주인공이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에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레닌과 다른 사람들이 만약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출두할 경우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회의는 레닌 등을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더욱 안전한 곳에 숨기도록 결정했다.

 

레닌은 알리루예프의 집에서 3일간 더 묵었다. 7월 9일 레닌은 알리루예프가 빌려준 모자를 쓰고 긴 셔츠를 입었는데, 마치 핀란드 농민처럼 보였다. 스탈린은 이발사 역할을 해서 레닌의 수염을 깎았다. 저녁에는 스탈린, 알릴루예프 등이 레닌과 지노비예프를 호송하여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앞에는 노동자 니아 예멜리아노프가 앞장섰고 레닌과 지노비예프가 그 뒤를 따랐다. 스탈린과 알릴루예프는 맨 뒤에서 걸었다. 그들은 레닌 등을 빈해역으로 배웅한 후, 그가 차에 올라타 안전하게 출발하는 것을 보고서야 되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닌은 라즈리프역 부근 마을에 있는 노동자 예멜리아노프의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예멜리아노프는 라즈리프 호수 부근에 지은 자신의 오두막으로 이사했다.

 

그 후 볼셰비키당의 절반이 지하 상태로 잠복했기에, 합법적인 신분을 유지한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가 당의 주요 지도자가 됐다. 스탈린은 종일 혁명사업에 바빴다.  그는 혼자라서 행동하기에 편했는데, 일이 없어도 그는 알리루예프의 집을 종종 방문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알리루예프 가족은 그를 친가족처럼 대해주었고, 스탈린은 그들 집에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혁명의 검은 악마"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한번은 올가 예브겐예브나가 스탈린을 위해서 새 옷을 사주겠다고 고집했는데, 스탈린은 시간이 없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올가는 자신이 스탈린을 위해 그의 몸에 맞는 옷 한 벌을 샀다. 스탈린의 부탁으로 그녀는 그의 상의에 보온용 안감을 대주었다. 스탈린은 어깨 패드와 넥타이를 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올가는 그를 위해 특별히 재킷을 개조했다. 알리루예프의 집에 가면 스탈린은 항상 피곤해 보였다. 그는 먼저 잠을 좀 자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항상 침대에 누워 파이프를 피웠는데, 그러다가 때로는 잠이 들어 담요를 태운 적도 있었다.

 

7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제6차 당대회를 주최했다. 회의는 반공개적으로 개최됐으며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레닌은 중앙위원회 특파원을 통해 페테르부르크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대회 업무를 지도했다. 대회는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오리민스키, 로모프, 유레네프를 의장단으로 선출하였다.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트로츠키, 콜론타이, 루나차르스키는 명예의장단을 구성했다.

 

트로츠키도 당시 임시 체포 때문에 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당내의 유명인사이긴 했지만 항상 뒤뚱 거렸다. 예컨대 1905년 혁명 기간 중 그는 짧은 시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하였는데, 유명한 ‘영구 혁명론’을 제기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어 유배를 떠났는데, 1907년 유배지를 탈출한 후 국외로 망명했다. 그는 비엔나에서 <프라우다>(1908-1912년)*를 출간하고 당내 다양한 파벌의 단결을 주장했다. 

 

*트로츠키가 이 때 발간한 <프라우다>는 1912년 경 볼셰비키가 창간한 <프라우다>(1912~1914년)와는 성격이 다르다.

 

1912년 프라하 회의 이후 그는 같은 해 8월에 ‘8월 연맹’을 조직했다. 그는 ‘연합’, ‘통일’, ‘비분파’의 기치를 내걸고 볼셰비키에 대항했다. 1917년 5월 미국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그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연합을 주장하는 지역연합파(區聯派)에 합류했다.  이 파벌은 2월 혁명 이후에는 통합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레닌의 4월 테제를 지지했다. ‘6차 당대회’ 이전에 지역연합파는 사실상 볼셰비키당의 성원이 되었으며, ‘6차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당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탈린은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를 대신해 총화 보고와 정치 정세에 관한 보고를 했다. 그는 7월 사건 이후 "정세는 이미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혁명의 평화적 시기가 끝나고, 격투와 폭발의 시기가 왔다."고 주장했다. 당의 현재 절박한 임무는 "제국주의 부르주아 독재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소비에트에 대해선 뿌띠부르주아계급 정당에 의해 장악되어 부패되어 이미 정권의 역할을 할 수 없기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또 보고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사회주의 개조를 '시작'하기 전에는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개조를 '유예'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수치스럽고 진부한 견해가 될 것이다. 어느 나라가 더 가능성이 높으면 그 나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러시아가 바로 그런 사회주의 길을 개척하는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 < 스탈린 전집 3권> 164-165, 62, 174쪽, 인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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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루예바의 집에서 스탈린이 살았던 방, 이 방은 미래의 아내인 알리루예바의 방과 통한다.

 

레닌의 지시에 따라 대회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일시적으로 철회하였다. 그 대신 반혁명적 부르주아독재를 완전 타도하고, 무장봉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동맹에 의거한 권력을 수립하자는 슬로건을 채택했다. 대회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는데 레닌이 133표로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지노비예프 132표, 카메네프와 트로츠키가 각각 131표를 얻었다. 또한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부하린 등도 선출되었다.

 

‘제6차 당대회’는 볼셰비키 당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노동자계급과 빈농에 의거한 무장봉기를 통해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전복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바로 그 다음 달인 10월에 볼셰비키당은 이 정책에 따라 혁명에서 승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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