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를 해부한다
  • ― 현대차재벌의 성립
현대차  현장신문 <노동자함성 4호> 2020. 10.26
등록일 : 2023.01.19

[편집자 주 : 앞서 ‘현대차 2025 전략’에서, 현대차가 미래차 경쟁에서 점차 뒤처지고 있는 원인이 ‘재벌경영’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 후속편으로 ‘재벌문제’에 대한 새로운 기획연재를 합니다.]

 

1. 현대재벌의 형성 

 

- 정주영의 창업과정

 

현대자동차 재벌의 모태는 ‘현대재벌’이다. 현대재벌의 창업자인 정주영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정주영은 1915년에 강원도 통천에서 빈농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가난이 싫어 18세에 단돈 47전을 들고 가출하여 잡역부로 부두하역, 철도공사판 등을 전전하던 중 서울의 미곡상인 복흥상회의 배달원으로 취직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배달원 생활 4년 만인 1935년에 신용 하나만으로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인수받아 신당동에 경일상회란 쌀가게를 개업하였다.” (이한구, [한국 재벌형성사] 중에서)
쌀가게 주인이던 정주영은 1940년 3월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소재한 자동차 정비공장 아도서비스를 다시 인수한다. 정주영은 빨리, 완벽하게 고치고 수리비는 많이 받는 방침으로 사업에 성공하였다. 1940~1942년 당시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는 자동차는 극소수의 부유층이나 탈수 있는 매우 비싼 사치품이었다. 다른 수리공장에서는 수리비를 더 받으려고 자주 늑장을 부렸지만, 정주영은 역으로 자동차가 고장 나면 돈 있는 차 주인들이 발이 묶여 힘들어하는 사정을 잘 이용하여 밤 12시까지 작업소에 머물면서 고객들 차를 빨리 수리했다. 이처럼 ‘빠르고, 정확하고, 납기 준수’ 경영에 입각한 사업전략이 적중하여 수익을 많이 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공장이 불타 없어지고 전쟁까지 일어나자 사업이 어려워졌다. 결국 일제는 기업 통제정책인 ‘기업정비령’을 실시하고, 종로 5가에 있던 ‘일진공작회’가 정주영이 소유하던 아도서비스를 강제 흡수·합병하였다. 정주영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을 그만둔 후, 아도서비스를 정리한 자금으로 트럭을 구입하여 석탄운반업을 시작하였다.

 

- 거대 ‘현대재벌’의 탄생


 해방 이후 서울 중구 초동의 적산대지를 불하받아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그것은 차량 정비를 하는 회사였는데, 설립 직후 미군 병기창에서 하청을 주로 받으면서 수요가 점점 늘어났다. 정주영은 다시 1947년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을 설립하여 미군 막사 및 부대시설을 건축하는 등으로 건설업에서 점차 기반을 잡아나갔다. 
이후 1970년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수출 드라이브 정책, 중화학공업 정책, 중동건설 특수 등 외부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현대는 국내 재벌들 중 가장 활발한 다각화 작업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으로 부상하였다. 1973년 현대중공업을 설립하여 조선업에 진출하였으며, 1975년에는 일본의 가와사키중공업(川崎重工业)과 합작으로 현대미포조선을 설립하였다. 또 1978년엔 인천제철, 대한알미늄공업과 한국불화공업을 일괄 인수하여 철강•알루미늄 등 소재산업에 진출하였다. 
이러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벌인 결과, 1970년대 후반에는 5개 업체를 인수하고 28개 자회사를 설립하는 등 총 33개 업체의 계열사를 갖게 되었다. 현대그룹은 그로인해 1978년 미국의 경제전문지인 포춘에 의해 세계 500대 기업 중 98위로 선정되었다. 
이후 1980년대 들어서도 그룹 확장은 계속되었다. 1983년 현대전자 인수, 1988년 현대석유화학 설립과 같이 새롭게 첨단 제조업 부문에 진출하는 외에도, 1987년에는 현대투자자문을 설립하여 그룹 산하에 현대증권,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종합금융, 강원은행 등 금융소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듯 삼성그룹보다 10여 년 뒤늦게 출범한 현대그룹은 1980년대 후반에는 삼성그룹을 제치고 마침내 국내 최대의 재벌그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자동차산업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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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전경. 1공장과 4공장이 보이고 그 가운데가 4공장문(구정문)이다.


현대자동차의 공식적인 역사는, 1966년 4월 미국의 포드자동차가 한국진출을 겨냥하고 국내 기업들과 접촉 중일 때 현대가 적극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현대그룹은 자동차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울산공업단지 내에 10만 평의 부지를 확보하였으며, 1967년 12월에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이 자본금 5천만 원으로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정식 설립하였다. 당시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의 포드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현대자동차는 설립 1년 만인 1968년에 조립차 코티나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이로써 신진자동차와 함께 우리나라 승용차 시장을 양분하면서, 1970년대 중후반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도 기술제휴를 맺었다.
1976년 1월 고유 모델인 포니를 시작으로 독자모델 생산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국산차를 해외 시장에 내놓았다. 1980년대 말에는 엑셀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서 세계 최대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1985년 11월 4일 출시된 소나타는 현대자동차가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2번째로 독자적 자동차모델 생산국가가 되었음을 알렸다. 
현대자동차가 기술적으로 자립하고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성장하는데는 1990년대 초의 독자엔진 개발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현대차는 일찍이 1960년대에 자체적으로 자동차 엔진을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엔지니어들의 전문성은 매우 낮은 편이어서 기술적으로 역부족이었다. 1980년에 신군부정권이 들어선 후, 정부가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압박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주영은 중공업은 나중에 투자하여 키워도 된다고 판단했기에 현대자동차를 택했다고 전해진다. 
현대는 본격적으로 자체 엔진 개발에 착수하기 위해, 해외에서 GM에 근무 중이던 이현순 박사와 크라이슬러의 연구원으로 있던 이대운 박사에게 연구개발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이들이 이 제안을 수락하자 1984년 현대자동차 마북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다른 한편, 현대는 1984년 6월 4일, 계약금액으로 107만2,000파운드를 지불하고 영국의 리카르도(Ricardo)와 엔진 개발을 위한 기술협력계약도 체결하였다.
이현순 박사를 비롯한 연구진들의 끈기 있는 노력으로, 현대자동차는 1991년 국내 최초로 자체 엔진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프로젝트 내 이름을 따 ‘알파엔진’이라고 불려 졌는데, 이후 베타엔진, 감마엔진, 그리고 성능을 더욱 향상시킨 세타엔진(2004년 NF소나타에 장착)과 타우엔진(2008년 개발)까지 나왔다.

 현대는 또한 자동차분야의 다각화를 개시하여 1974년에 현대자동차서비스를 설립하였다. 1977년에는 수송용 기계산업에 진출하면서 조선, 컨테이너, 철도차량, 장갑차 등 특수차량의 제조를 목적으로 현대정공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현대모비스’의 전신이 되었다. 1998년 12월 1일에는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해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아차를 인수하였는데, 이는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자동차업계의 판도를 흔드는 큰 사건으로 기록된다.

 

2. ‘왕자의 난’과 현대차재벌의 성립

 

현대차의 경영권이 바뀌던 1999년 초, 현대차는 그동안 정세영의 리더쉽 하에 가파르게 성장하여 세계 11위까지 오른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왕회장 정주영의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황에서 차기 후계구도를 중심으로 권력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당시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정세영(당시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정몽규(정세영의 장남, 당시 현대자동차 회장) 부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현대차 보유지분을 일 년 만에 4%에서 8.3%까지 끌어올리는 등 은밀한 경영권 방어에 대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99년 2월 26일 열린 현대차 주주총회에서 정몽구와 정세영이 대립했다. 결과는 정몽구회장의 측근들이 중용되는데 모두 실패했으며, 그 자리에 정세영 회장 측 인물들이 선임되었다. 얼핏 이날 주총은 정세영·정몽규 부자의 승리로 막을 내린 듯 했다. 하지만 이는 왕회장 정주영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정세영의 쿠데타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곧바로 정주영은 정세영을 불러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게 잘못됐어?”라고 말했다. 불과 나흘 후인 3월 2일 현대그룹은 정세영 명예회장이 현대차 경영에서 완전히 퇴진하며 현대자동차는 정몽구 체제로 개편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매일경제신문에 따르면 이 발표는 정세영과도 미리 조율되지 않은 내용이었다고 한다.
보도된 바로 다음날인 3월 3일 곧바로 정세영 현대차 명예회장의 이임식이 거행되었다. 정세영은 “정주영 명예회장 장자인 정몽구 그룹 회장이 현대자동차를 이어받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으나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3월 10일 정몽구의 현대차 회장 취임식이 진행되었고, 현대차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 정세영 부자에게는 현대산업개발(당시 자산가치 3조 5천억원)이 주어졌다. 
1999년 현대정공 자동차부문과 현대자동차서비스가 현대차와 합병되었고, 2000년 8월 다른 계열사 9개와 함께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현재의 현대자동차그룹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2009년 정몽구회장의 아들인 정의선이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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