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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정치방침 및 총선방침 수립을 위한 제77차 임시대의원대회  모습 

 

3. 먼저 내부 ‘진영 구도’를 바꿔야 한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의 분위기는 강하지만,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2024총선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2016년 촛불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성과가 민주당 몫이 되거나, 소위 ‘자매정당’이라는 그들의 우호 세력에게 귀속되기 십상이다. 그럴 경우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민주당의 집권에 멍석을 깔아주게 된다. 결국 5년 후 혹은 10년 후엔 또다시 윤석열과 같은 보수반동정권이 복귀하는 수레바퀴가 되풀이 될 것이다. 이제 이런 지긋지긋한 쳇바퀴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무엇을 해야 하나?


지금처럼 민주당이 주도하는 ‘윤석열정권 심판’ 구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진보진영 내부 구도를 쇄신하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의 ‘엔엘:피디’ 구도는 변혁이 아닌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득권세력을 위한 구도로 변질된지 오래다. 이 같은 구도로는 결코 민주당으로부터 대정부 투쟁의 주도권을 탈취할 수 없다.


지금의 ‘엔엘:피디’ 구도는 원래 1980년대 한국 변혁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사구체 논쟁을 계기로 출현했다. 따라서 그것은 이후 한국사회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 

 

첫째, 이 구도는 진보 변혁진영 내부가 분화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1990년대 들어 ‘사민주의세력’이 전면 등장하고 이후 ‘정의당’으로 자기 정립함으로써, 진보 변혁세력 중에서 ‘피디’는 이미 단일 대오가 아닌 맑스레닌주의를 신봉하는 변혁세력과 개량주의 노선을 따르는 사민주의세력으로 분화되었다. 따라서 단순히 한국사회에서 계급모순이 우위인가 아니면 민족모순이 우위인가 만으로는 진보 변혁세력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중 사민주의 세력은 비록 상대적으로 민족모순보다 계급모순을 중시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전통 맑스주의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며 기껏해야 맑스 베버류의 다원주의 계층이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선 정의당이 유시민 등의 진보적 시민세력과 함께한다거나, 최근 류호정의 신당창당 관련한 사건에서 보듯이 상당 정도 ‘시민정당’적 요소를 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좌파 변혁세력과 정의당으로 대표되는 사민주의세력 간의 차이는 ‘엔엘과 피디’의 차이 만큼이나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 진보·변혁운동은 사실상 엔엘 대 피디의 양분 구도가 아닌 ‘삼분 구도’로 보는 시각이 더욱 정확하다. 사실 현실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간주되어왔다. 예컨대 민주노총 내부의 정파 구도를 논할 때 보통 ‘국민파:중앙파:현장파’ 3파 구분법을 많이 쓰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각각 전국회의로 대표되는 엔엘계열, 과거 ‘전진’ (최근엔 ‘평등의 길’)으로 대표되는 사민주의계열, 그리고 과거 ‘노동자의 힘’으로 대표되는 범맑스주의계열을 지칭한다. 또 이들과 가까운 진보정당으로는 각각 진보당, 정의당, 노동당이 있다.

 

둘째, 199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접어들어 한국사회 전반의 주요모순으로 등장한 비정규직문제, 원-하청 노동자문제를 기존의 엔엘:피디 구도는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는 자체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재벌체제와 관련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현장권력의 상당 부분이 노동조합에게 넘어감에 따라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량 출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는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경쟁력 기반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재벌체제와 관련된다. 


하지만 엔엘이든 피디든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를 ‘신자유주의’ 일반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면서, 한국사회 본질로부터 파생되는 ‘주요모순’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서도, 단순히  여러 과제 중 다소 중요한 문제로만 치부함으로써 사실상 경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봉건식민지사회에서의 ‘토지문제’처럼, 변혁노선과 당 건설 전반에 걸쳐 전면적으로 반영해야 할 핵심 문제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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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투쟁
 

지금 민주노총이 전면적인 비정규직 철폐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주어진 현실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그 점을 말해준다. 이러한 경향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민주노총 주도의 ‘제2의 정치세력화’ 논의에 있어 여전히 ‘의회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중 하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과거 경험이 입증하는 것처럼,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의석수를 늘려 국회 입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인 비정규직문제를 전면적으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엔엘이든 피디든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가장 첨예한 임무를 비껴가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잠재된 거대한 변혁적 에너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엔엘과 피디 그 어느쪽 정파가 대중조직의 집행권력을 장악하든지 간에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전면적으로 조직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정치조직 즉 진보정당의 경우는 더욱 말할 나위 없다.

 

셋째, 지금의 엔엘:피디 구도는 최근 현대제국주의 모순이 첨예하게 발전하는 국제정세의 변화 추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지금의 엔엘:피디 구도는 8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서 계급모순이 우선인가 민족모순이 우선인가를 중심으로 설정되었다. 즉 이 구도는 국내적 상황을 주로 반영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냉전 질서 해소와 때를 같이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전면적 진행과 지구적 단일시장의 성립, 이 같은 토대 위에서 미국 단일패권 질서의 수립으로 인해 국제적 요인이 국내 생활이나 계급투쟁과 긴밀히 연계되고 전면 투사되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특히 피디 진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엔엘 진영의 경우는 민족모순을 강조하는 그들의 특성상 ‘제국주의’에 관한 인식이 비교적 투철하다. 따라서 그들은 국제문제에 대해 좀 더 민감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국제문제에 대한 피디 진영의 무관심과 낮은 인식 수준은 한심할 정도이며 절로 탄식을 자아낸다. 물론 엔엘 진영이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피디 진영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고 하지만, 정확한 맑스-레닌주의 유물변증법적 시각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적 관점이 아닌 비교적 협소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한계가 있다.


국제정세에 대한 피디진영의 잘못된 시각은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둘러싼 중미 간 ‘G2’ 경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최근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성격, 그리고 브릭스와 ‘다극화’를 바라보는 시각 등에서 첨예하게 표출된다. (현재의 엔엘:피디 구분법에 따르면) 피디진영의 우파라 할 수 있는 정의당과 사회진보연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러시아에 의한 침략전쟁으로 바라본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나토를 마치 그것에 맞서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세력으로 간주하며, 그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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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피디 좌파로 분류되는 노동사화과학연구소(노사과연) 등은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는데, 이는 그들의 독특한 ‘제국주의 피라미드론’에 따른 것이다.

이와 비교할 때, 엔엘진영은 대부분 러시아 측을 지지하는 편이다. 이 문제를 미국과의 국제 반제투쟁의 일환으로 정확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과연 누가  노동자계급적 시각에서 올바르게  바라보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지금의 엔엘:피디 구도는 21세기에 진입한 오늘날의 변화된 국내외 정세와 계급투쟁 상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 이런 구도를 계속해서 견지할 경우 한국의 진보 변혁운동은 이론과 실천 상의 괴리가 심각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이론은 실천에 대한 '나침반' 기능을 상실하고, 변혁적 이론의 지도를 받지 못하는 실천 또한 개량주의적 틀에 갇히게 된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


4. 현장의 사례

 

80년대 성립한 ‘엔엘:피디’의 낡은 구도가 아직 유지되는 이유는 이를 통해서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에서 이미 괴리가 발생한 이상, 어느 쪽 노선을 따르고 정파에 속한들 자신의 기회주의적 실천은 전혀 구속받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실례를 곧 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엔엘이냐 피디냐 어느 한편의 간판을 내거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들은 이 구도에 입각해서 ‘민주파’로 행세할 수 있고, 대중조직의 경우 이를 이용해 집행권력을 교대로 장악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이처럼 지금의 엔엘:피디 구도는 기회주의자가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출세주의자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몇 개의 사례를 소개하도록 하자.


우선 노동운동의 상황을 보자.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윤석열 정권의 노동운동 침탈에 맞서 민주노총은 7월 총파업을 선언하고 상반기 내내 그 사업을 추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노총이든 산하 산별조직이든 진정한 총파업의 조직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현재의 엔엘과 피디 정파에 의해 장악된 이들 상층조직은 7월 총파업이 윤석열 정권의 노동탄압을 분쇄하기 위한 진정한 투쟁이 아니라, 정권이 허용하는 합법적 틀 안에서 기존의 ‘시기 집중’ 식의 맥 빠진 투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끔 했다.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전국회의(엔엘) 소속인 양경수 위원장의 연임을 위해 모든 것을 집중했다. 이 ‘연임 전략’은 진보당의 2024총선 전략과도 관련이 있다. 즉 엔엘계가 가급적 민주노총 집행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총선을 치름으로써, 진보당이 한 석이라도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할 수 있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대표적인 노동자 밀집 도시이자 지역구 당선 가능성이 있는 울산의 경우,  2023년 하반기 현대차지부 10대 임원선거에서 어떡하든 ‘민주현장’(전국회의계열의 현대차 울산공장 내 현장조직) 후보의 승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한 선거계획을 수립했다. 우선 전국조직인 전국회의 차원에서 금속노조 본조 임원선거에서 피디계열로 분류되는 ‘민주노동자’(현대차 울산공장 내 ‘현장파’ 조직인 ‘민투위’가 변신한 조직) 측 후보인 전규석씨를 금속노조 차기 위원장 후보로 공동 추대키로 양 조직 간에 협약을 맺은 것이다. 


그 대가로 현대차지부 임원선거에선 민주현장과 민주노동자가 함께 참여하는 ‘5자 연대’를 통해 민주현장(엔엘계) 후보인 문용문씨를 당선시킨다는 협약 또한 맺어졌다. 하지만 이 협약은 나중에 민주현장이 민주노동자 측에 약속한 수석지부장 자리와 관련하여  후보 경질을 요구하는 바람에 깨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동자는 자신의 지부장 후보(임부규씨)를 내세워서 독자 출마를 하였다. 


이렇듯 전국회의 측이 자파 후보를 지부장으로 당선시키려는 현대차지부의 선거연대가 사실상 무산되자, 전국회의는 금속노조 본조 임원선거에서도 자연히 무성의로 일관했다. 애초 공동후보로 내세웠던 민주노동자 출신 전규석 후보에 대해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때문에 현장 기반이 별로 없는 ‘평등의 길’(중앙파) 후보가 어부지리 격으로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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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금속노조 임원선거에서 ‘평등의 길’(중앙파) 장창열 후보가 위원장으로 당선된 것은 말 그대로 ‘이변’이라고 평가받는다. ‘기호 1번’이라는 행운이 갖다준 이점 외에도, 분명 최대 현장기반을 갖고 있던 전국회의 측이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로 나선 양경수 씨의 당선을 위해 “무조건 기호 1번을 찍어라”는 우스광스런 선거지침을 조직원들에게 하달했기 때문이다. 양경수 후보는 민주노총 임원선거에서 기호 1번 이었다. 


이와 관련한 설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2023년 하반기에 진행된 임원선거는 민주노총 총연맹 차원의 선거뿐만 아니라,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 등 산하 산별노조, 그리고 민주노총 15개 지역본부와 각 산별노조의 지역지부 선거가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선거 형식에 있어서는 동일한 날짜에 전국에 분포한 조합원들이 직접 투표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조합원들이 받아 든 후보자 명단만 해도 수십명에 달했다. 따라서 일반 조합원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각 정파의 조직원들 조차도 자기 쪽 후보가 누구인지 가름하기가 힘들었다. 그 때문에 민주노총 내 최대 정파인 전국회의는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인 양경수씨를 우선적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조직원들에게 ‘무조건 1번’을 찍으라는 지침을 내렸다는 후문이다.


이 사례만 보더라도 지금 현장 내에서 엔엘:피디 구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알 수 있다. 

 

 ‘엔엘: 피디’ 구도가 기층 현장에서 더 이상 무의미해졌음을 보여주는 더욱 극적인 사례가 있다. 그것은 한국 최대 전략사업장인 현대차 내 현장조직 간의 이합집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통 ‘현장파’(피디)의 맥을 잇고 있는 민투위 조직은 2023년 2월경 조직을 해소하고 실노회(엔엘)의 맥을 잇는 ‘혁신민주’(이 조직의 사실상의 리더는 박상철씨로, 그는 과거 정갑득 씨와 함께 실노회를 이끌었다.), 그리고 대표적인 어용 계보를 잇는 ‘현장노동자’(현재는 ‘미래희망’으로 명칭 변경)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민연투' 이상 3개 조직이 통합해 ‘민주노동자’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 세 조직 각각의 과거 역사를 보면 이들은 원래 현장파, 국민파, 그리고 어용파에 속하기에 이번 통합조직 탄생 과정에서 ’엔엘:피디‘라는 구도는 눈을 씻고 보아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선 ’보다는, 오직 차기 임원선거에서 어떤 식의 배합이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지 이 한 가지 점에 집중되었다. 


10대 지부장 선거를 겨냥해서 3개 현장조직이 통합해 만든 ‘민주노동자’는 이번 선거 패배의 후유증으로 다시 조직이 분해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소외를 경험한 ’혁신민주’계열이 떨어져 나올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민주노동자 잔류세력은 민투위(민투위 계열 일부는 10대 임원선거 직후 이미 탈퇴했다)와 민연투 계열만이 남게 된다. 또 이들은 차기 집권을 위해서 현장노동자(어용계열)에서 이름만 바꾼 '미래희망'과 합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들 각자 조직의 힘만으로는 '차기' 집권의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태가 이렇게 흘러간다면 애초 정통 ‘현장파’에 속한 민투위의 흔적을 우리는 더욱 찾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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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10대 임원선거 모습 


이처럼 지금 현장에선 엔엘:피디 구도가 ‘변혁노선’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작용하고 있다. 오직 임원선거에서 집행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로 간의 밀실 협약이 진행되고, 타협과 야합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밀실 협약을 통해서 어느 쪽이 당선되든지 그것은 노동운동의 개혁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은 물론이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집행부대로, 금속노조나 공공운수노조 등 산별노조는 산별노조대로 자기파 조직원을 임원 혹은 실국장급 전임 간부에 앉혀 파벌을 키우고 선거 승리의 전과를 챙기는데 급급할 뿐이다(그것이 설령 2~3년의 임기 동안만일지라도). 당면 한국노동운동의 핵심과제인 정규직-비정규직 간 전략적 연대의 실현, 더 나아가 정권과의 과감한 정치투쟁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주어진 임기를 무사히 마친 후 내려오는 것이 어느덧 관례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조직의 경우는 어떠할까? 앞서 언급한 현대자동차 민투위 조직의 주요 성원들이 피디계열인 노동전선과 ‘좌파활동가 전국결집’(약칭 ‘전국결집’)의 조직원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중 노동전선은 과거 '노동자의 힘'(약칭 '노힘') 계열 중에서 현장운동을 고수하면서 남은 선진적 활동가와 변혁적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전국결집‘과 함께 변혁적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우리는 이들을 현장조직과 당 조직 중간에 있는 ‘준정치조직’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혁적 준정치조직이 앞서 민투위의 사례에서 보듯, 그 현장 조직원들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결국은 준정치조직과 현장조직, 그리고 노선(이론)과 현실(실천) 간의 심각한 괴리가 발생한다. 이렇듯 이론과 실천이 괴리된 조직은 결코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이론이 화려할수록, 현실에선 일부 타락한 분자들을 위해 대중을 기만할 수 있는 그럴듯한 ‘포장’을 제공할 뿐이다. 


 다음으로 '전국결집'을 보자. 그들은 처음 우파 즉 '엔엘' 세력에 맞선 좌파('피디')의 총집결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좌파결집'이라고 이름 붙였다. 애초 전국적으로 ‘3천명 전투적 대오’를 꾸리겠다던 야무진 꿈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카드뉴스’ 혹은 성명이나 발표하는 조직으로 머물러 있다. 이번 민주노총 선거에서 기호 2번 박희은 후보팀을 꾸려 양경수 후보와 경선하였지만 결국 적지 않은 표 차이로 참패하고 말았다. 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현장조직은 ‘공공운수현장활동가모임’(약칭 ‘공활모’) ‘금속활동가모임’(금활모) 그리고 앞서 언급한 민투위 정도인데, 그들은 현장에서 별반 투쟁력을 갖추지 못하기에 ‘전국결집’ 또한 별반 투쟁력이 없다. 결국 이들 또한 민주노총 선거를 겨냥한 ‘선거연대’ 차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원래 ‘전국결집’의 전신인 ‘좌파결집’이 출발한 배경부터 그러하였다. 지난 2020년 민주노총 선거 때 이영주 후보를 중심으로 모인 좌파 활동가들이 당시 얼마간 높은 득표를 얻은데 고무되어 그 선대본을 발전시킨 것이 출발점인데, 이번에도 ‘선거를 위한 조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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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결집 공동대표 이영주씨

 

이제 끝으로 정치조직 즉 정당 활동을 하고 있는 좌파(피디)를 보자. 애초 ‘노동자의 힘’ 중 당 건설을 추진하는 세력은 사회주의 독자정당 사업을 추진하다가 ‘사노위변혁당’을 거쳐 2022년 2월 노동당과 합당하였다. 현재 중앙당 차원에서 당권을 장악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이들 구 변혁당계가 노동당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음모적이고 분파적인 작풍일 뿐, 그들이 평소 주장했던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한 대중투쟁의 전개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주의와 노동운동과의 진정한 결합을 추진하는 대신에 그들은 이번 ‘양규서-함계남’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분파적 결집과 이질적 분자에 대한 배척에 열중할 뿐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피디(좌파)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이 구도의 다른 한 축인 엔엘진영 역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앞서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가 지난해 상반기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가 그러하며, 정당 차원에선 민주당과의 선거연대에 미련을 못버리고 있는 진보당의 행태가 말해주듯 사실상 의회주의와 합법주의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대중조직이든 정당 차원이든 현재의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를 근본적으로 돌파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단지 그 위에서 운동진영 최대 정파로서의 지위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엔엘과 피디진영 (이 구도에 따르면 정의당처럼 완전히 사민주의로 탈바꿈해 변혁성을 상실한 세력도 ‘피디’로 분류한다)은 전체로서 볼 때 민주당이나 보수반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과 조직세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된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각급 대중조직을 교대로 장악하고, 국회의원 몇 석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는 등 알량한 ‘기득권’ 지키기에 바쁘다. 이런 구도를 가지고서는 현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내고, 정당운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구도로는 진보 변혁진영은 백년 세월이 흐른들 민주당의 헤게모니를 손톱만큼도 건드릴 수 없으며, 영원히 반정부세력 중에서 ’2중대‘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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