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기획연재] 한국노동운동사②
등록일 : 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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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노련과  원산총파업  장면

 

1. 발단


원산 총파업은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80여 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1928년 9월 영국계 기업 문평 라이징선((Rising Sun) 석유정제회사에서 일본인 중간 관리자에 의한 노동자 구타와 민족적 차별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이 회사 영국인 자본가는 원래 합의한 일본인 감독의 처벌, 최저임금제 확립, 단체계약권 체결 등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아 이듬해 초 원산 총파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2. ‘원산노련’과 ‘원산상업회의소’ 대립으로 전면화


이 회사 노조원 200여 명은 상급단체인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의 지도에 따라 1929년 1월 13일 약속이행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총파업이 일어날 무렵 원산노련에는 약 2,000명의 조합원을 가진 54개의 가맹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원산노련은 산하 조직들에게 문평파업을 적극 지원할 것, 라이징선 석유회사와 관계된 일체의 상품 수송을 거절하고 동정파업을 단행할 것 등을 지시했다. 


문평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원산지역 일본인 자본가 연합단체인 ‘원산상업회의소’가 적극 개입했다. 그동안 원산노련을 눈에 가시처럼 여겨왔던 터라, 이번 기회에 아예 그것을 파괴하려고 결심했다. 원산상의는 라이징선의 파업을 결근으로 처리하도록 하고, 앞으로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들은 채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기금을 조성하여 폭력배를 모아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노동자를 채용하겠다고 원산노련을 압박했다. 
이리하여 파업은 원산노련으로 대표되는 총노동과 원산상업회의소로 대표되는 총자본 간의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원산 2.png
80여일 간 진행된 원산총파업의 한 장면

 

3. 지역 내 탄탄한 조직기반 구축한 원산노련


총파업을 선언한 원산노련은 결연한 태도로 파업투쟁을 지도했다. 1920년대 중반 원산노련은 산하 단체의 가입금을 토대로 소비조합과 노동병원을 운영했을 만큼 탄탄한 재정을 갖추고 있었다. 원산노련은 이렇듯 평소 구축한 재정을 바탕으로 미리 3개월 치 식량을 구입하고 파업 노동자의 생계를 지원했다. 


원산노련은 또 규찰대를 조직하여 자체 규율과 질서를 확립하였다. 특히 규찰대는 원산상의와 운송업자들이 인천 등을 통해 외국 노동자를 불러오려는 계획을 저지하였으며, 파업 노동자의 동요를 방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조선노동자들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수 없다”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발휘하여 취업을 거절하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4. 일제의 탄압과 지도부 체포


파업투쟁이 확대되자 ‘조선총독’을 비롯한 경무국·내무국 관리들과 함경남도 ‘지사’까지 동원되어 총파업을 진압하는데 분주했다. 1월 29일 그간 표면상으로 불간섭을 표명해 온 일제 경찰은 소비조합의 장부를 압수하였으며, 원산노련 김경식 위원장을 검거했다. 일제경찰은 2월 10일 다시 원산노련 회관을 습격 수색하고, 노련의 붉은 旗와 마르크스·레닌의 초상화까지 압수하고 파업기금을 강탈했다. 조선 각지와 국외로부터 오는 파업 원조금을 차단하여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려 하였다. 
 파업 한 달 사이에 노조 간부 42인이 구속되었다. 원산노련은 이 같은 지도부의 체포에도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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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총파업으로 수감된 김경식 위원장

 

5. 개량주의적 지도부의 굴복, 하지만 일제와 자본가들 손실 또한 만만치 않아


김경식 위원장이 체포된 후 변호사 출신 김태영이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새 지도부는 파업을 개량주의적이고 타협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새 지도부는 선진적이었던 원산노련의<강령>“노동운동의 통일과 무산자의 세계적 제휴를 도모하고 무산계급의 해방을 기한다,”를 개량주의적이고 노사협조주의적인 “생활향상을 위한 노동자의 수양을 본위로 함”으로 변경시켰다.


그런데도 자본가단체인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련의 완전 굴복을 고집하며 노동자들의 생활이 곤궁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파업이 석 달째 접어들자 준비된 기금과 식량이 점차 바닥나고 파업 이탈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파업노동자들은 이러한 지도부의 배신적 행동과 일제 경찰의 야만적 폭압, 파업기금의 결핍과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결사 항쟁을 이어갔다. 1929년 4월 1일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파업노동자들은 어용단체인 ‘함남노동회’를 급습했다. 그들은 ‘함남노동회’ 부근 일대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돌멩이와 곤봉들을 휴대하고 이 반동단체의 두목들과 주구들을 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원산노련의 개량주의적 지도부는 마침내 4월 6일 파업노동자들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집행위원회를 열고, 자본가들의 요구조건을 모두 접수한 후 총파업 종결을 선언해 버렸다. 결국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하여 80여 일간 지속된 총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일제와 그 자본가들이 입은 물질적 손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총파업 기간 동안 원산항의 수출총액은 1928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32만 5,500여 원이나 감소되었고, 자본가들의 파산 또한 속출하였다.

 

[교훈]  강고한 ‘지역연대조직’ 건설의 필요성 제기

 

일제 강점이라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원산총파업이 3개월 동안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원산노련’이라는 강고한 지역연대조직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 점은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노동운동은 87년 대파업 때의 전노협-지노협으로 상징되는 지역연대 투쟁의 전통을 계승하지 못한 채, 95년 민주노총 결성 이후 형식적인 총연맹과 산별조직 건설로 대신함으로써 허리가 취약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적에게 실질적 타격을 주는 총파업이 아닌 상징적인 ‘뻥파업’만 유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산총파업과 전노협이 보여준 강고한 연대투쟁 정신은 한편으론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실질적 강화와 함께, 다른 한편에선 정규직-비정규직, 원-하청 연대실현을 위한 노동자들의 지역연대조직 건설로 부활해야 한다.

 

출처: 현대차 현장신문 <노동자함성>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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