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에 러시아로 망명, 의병투쟁 

 

지금부터 111전인 1910년 3월26일은 안중근의사가 중국 땅 뤼순에서 일본에 의해 사형을 당한 날이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1907년 8월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이 서울에서 전투를 벌일 때 안창호 등과 함께 시가전에 뛰어들어 50여명의 부상병을 입원·치료시켰다. 이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대한제국 백성들의 울분이 한 순간에 '뻥' 뚫린 장쾌한 순간

 

그로부터 2년 후 1909.10.26. 하얼빈 역.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이토 히로부미와 코코프체프가 나란히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수행원들이 뒤따랐다. 그때 하얼빈역 플랫폼 기둥에 달린 시계침은 오전 9시 25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이토는 각국 영사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일본 거류민단 환영객 앞을 지나 다시 러시아 의장대 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안중근은 줄곧 이토 일행의 동선을 뚫어지게 주시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 순간 안중근은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권총을 발사하고자 재빨리 러시아군 의장대 뒤쪽에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이토 일행에게 집중된지라 다행히 안중근의 돌출행동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토 일행이 막 러시아군 의장대 앞을 지날 때 안중근은 그 순간을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가슴에 품고 있던 권총을 재빨리 뽑았다. 그때 안중근과 이토와 거리는 열 발자국(9미터) 정도였다. 안중근은 온 정신을 집중해 첫 방아쇠를 당겼다.
코레아 우라! 탕!
권총 발사소리와 함께 첫 탄알이 이토의 팔을 뚫고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총소리는 주악 소리에 뒤섞여 그때까지 경비병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중근은 다시 혼신을 다해 두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탕! 두 번째 탄알은 이토의 가슴에 명중했다. 경비병과 환영객들은 그제야 돌발사태를 알아차리고 겁을 먹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 흩어지거나 도망쳤다.
총을 맞은 이토는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비틀거렸다. 안중근은 침착히 이토의 마지막 남은 숨을 확실히 끊고자 다시 가슴을 정조준 한 뒤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탕! 세 번째 탄알은 이토의 복부 깊숙이 명중했다. 이 탄알은 이토의 명을 단시간에 확실히 끊어준 절명의 탄이었다. 그제야 이토는 코코프체프 쪽으로 픽 쓰러졌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의 장쾌한 거사였다.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안중근은 만세를 마치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침내 다 끝냈다. 그래서 그는 권총을 거꾸로 잡은 뒤 러시아 경비병에게 건네주며 스스로 당당하게 연행됐다. 
그때 하얼빈 역 플랫폼 시계는 오전 9시 3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jpg
안중근 장군의 ‘위국헌신 군인본분’ 글씨

 

사형집행 5분전 안중근의사.jpg
중국 땅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하기 5분전 안중군 장군 모습.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 사살, “포로로 처리하라!”

 

안중근에 대한 재판은 정치재판이었다. 병합계획에 방해되는 것은 신속히 없애야 했다. 안중근은 예심도 거치지 않았고, 그의 법정 발언은 전체 내용이 아니라 ‘요약’된 부문만 통역돼 재판부에 전달됐다. 뤼순에서 진행된 재판은 2월7일부터 14일까지 6차례에 걸쳐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며 2월14일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뤼순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안중근은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이토를 저격한 것이지 자객으로서 한 것이 아니다”라며 “포로를 처벌하려거든 국제 공법(公法)에 따라 처리”해 줄 것을 요구했다. 대한의군에 대해서도 재판 진행 중 판사가 안중근 장군에게 ‘대한의군 자체가 국가적, 정부적 차원의 근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고종황제가 1907년 7월 이토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할 때, "나라가 위급 존망에 처했는데 두 손 쥐고 보고만 있는 것은 국민 된 도리가 아니라"는 조칙을 내렸는데 우리들은 이것이 궐기를 지시하는 것으로 알고 의병 항쟁에 나선 것’이라고 당당하게 답하였다.
지금 부터라도 안중근 의사라는 호칭보다는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으로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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