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두 권의 책이 대학가를 술렁이게 했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김산·님 웨일즈의 <아리랑>. <노동의 새벽>이 대학생들에게 노동현장에 대한 관념적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현장의 땀과 눈물을 체감하게 했다면, <아리랑>은 조선과 일본, 중국 대륙을 주름잡으며 항일혁명과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선배들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시킨 사건이었다.


동란(1905년 러일전쟁)의 와중에 가난한 조선의 농가에서 태어나 1938년 서른셋의 나이에 적이 아닌 동지의 총탄에 스러질 때까지 김산(본명 장지락 혹은 장지학)이 넘어온 아리랑 고개는 몇 구비이며, 오늘 우리가 넘고 있는 고개는 또 어디쯤일까.

 

나라 잃은 백성이 넘어야 했던 ‘나그네’ 고개


김산이 열네 살 때 3·1 운동의 메아리가 조선팔도에 울려 퍼졌다.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대오를 이루어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를 누비는 장면을 본 어린 김산은 “너무나도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하루 종일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던 감격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혹했다. 일제의 무지막지한 탄압에 비폭력으로만 일관하는 조선 민중들이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 교회는 우리 민족의 편이라 믿었건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된 것은 하나님이 조선에 벌을 내리는 것”이며, “죄를 다 갚기 전에는 조선이 독립되지 못할 것”이라고 뇌까리는 선교사의 말에 그는 격분했다. 그에게는 더 넓은 세상, 다른 세계가 필요했다.
연인원 300만 명이 참가한 3·1 운동에서 수많은 구속자는 있었지만 사형을 언도받은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세계 여론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제는 재판 대신 시위 현장에서 모조리 총으로 쏴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이다!’ 그가 3·1 운동을 통해 배운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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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로 쓸어 넘긴 머리와 짙은 눈썹, 상대를 쏘아보는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이 김산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1931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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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연안 시절 김산(1906-1938). 1937년 님 웨일즈가 찍은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김산의 전신 사진이다.

 

둘째 형이 맡긴 돈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떠나 고학을 하면서 동경제대 입시를 준비하던 중,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들이 누명을 쓰고 학살되는 것을 경험한 김산은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모스크바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나 모스크바로 가는 것도 순탄치 않아 하얼빈에서 길이 막혔다. 다시 방향을 틀어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향했다. 천신만고 끝에 700리 길을 걸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입학을 청원했으나, 18세가 입학 최저 연령이라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당시 그의 나이 열다섯.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신흥무관학교에 오기까지 김산이 어린 나이에 겪은 고난과 열정에 감복한 학교당국은 예외적으로 3개월 단기과정을 허락하게 된다.
속성과정을 마친 그는 잠시 보통학교 강사를 하다가 더 넓은 세상과 혁명을 꿈꾸며 상해로 떠난다. 그곳 상해에서 오성륜·김충창(김성숙)과 인연을 맺게 되고, 의열단의 김원봉과 안창호·이동휘 등도 만나게 된다. 김원봉과 만나 아나키즘에 심취했던 그는 김충창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수받게 된다. 오성륜과 김충창은 김산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동지가 됐다.

 

생사를 넘나든 광동코뮌의 ‘회오리’ 고개


아버지와의 ‘합의’에 따라 북경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김산은 다시 혁명의 뜻을 세우고 1925년 손문의 중화민국 정부가 있던 광동성 광주로 떠난다. 광주에서 조선청년연맹 간부로 활동하던 중 ‘운명의 해’ 1927년을 맞이한다.
1927년 12월10일은 장지락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일이 벌어진 날 가운데 하나”였다. 광동코뮌이 일어났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광동을 지배하고 있던 리지선(李濟深) 장군과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려던 장파쿠이(張發奎) 장군의 분열을 이용해 가능한 빨리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927년까지 8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광동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우리 조선의 활동적 지도자의 정예가 여기에 다 집결한 것이다. 우리들의 평균 나이는 23세였고 일부 중학생들은 열너덧 살밖에 안 됐고 800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도 마흔이 채 안 됐다.” (계속)

 

이글은  매일노동뉴스에 연재된 글로 저자인 정요일 님의 양해 하에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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