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기획연재] 한국노동운동사④
등록일 : 2023.02.01

한국 노동운동사에는 두 번의 총파업이 있었다. 해방 직후 1946년 9월 총파업과, 1996년12월 ‘노개투’ 총파업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해방정국의 핵심 요소로 작용했던 전평과 ‘9월 총파업’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공장 자주관리운동의 출현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무조건 항복과 광복은 한국인들에게 마냥 기쁨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전쟁을 위한 수탈이 중단되고, 더는 징용이나 징병을 걱정할 일은 없어졌다. 하지만 자본가였던 일본인이 기업활동을 정지하자 공업생산은 일제강점기의 30% 이하로 하락했고, 쌀값은 올랐지만 도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일제강점기보다 1/3 수준으로 하락했다. 해외로 징병, 징용되었던 노동자들이 귀국하여 실업자의 수가 100만 명을 훨씬 상회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일제 하 잠시 숨죽였던 노동운동은 해방정국을 맞이하여 ‘공장 자주관리운동’의 형식으로 부활한다. 이제까지 일본인 아래서 땀 흘려온 공장은 자기들의 것이며, 자기들이 기업경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당시 노동자들의 의사표시는 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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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서 자주적 공장관리운동이 전개된 기업체는 조선방직주식회사(사진), 부산 조선중공업회사, 동광고무주식회사, 조선운수주식회사, 조선기선회사 등이었다.

 

 

 2. ‘공장관리위원회’에서 ‘공장자치위원회’로

 

“안되오. 당신 맘대루 기계를 돌릴 수 없소. 오늘부터 이 공장에서 당신 명령은 통하질 않소. 명령할 권리는 우리들에게 있소.” 
이 글은 이규원의 단편소설 「해방공장」(1948년)의 한 대목이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부평 군수산업단지 주물공장의 노동자들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기계를 세워버린다. 자동차 공장에서도, 제관 공장에서도, 포탄 공장에서도 일본인 관리자들은 더는 억압적인 자세로 임할 수 없었다.
천황이 항복하자 일본인들은 조속히 퇴각할 궁리만을 하였다. 남은 자산을 현금화해서 일본으로 송금하고, 설계도면을 불태우고, 공장의 중요한 부분을 폭파하는 식이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일본인 관리자들이 공장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한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했다. 전체적으로 공장자주관리는 그 역량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일제 자본으로부터 공장을 접수하고 인수하기 ▲공장 파괴와 자재 유출에 맞서 공장을 확보하고 관리하기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자본금•자재와 물품을 마련하고 기술자를 확보하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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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평회관(위위쪽) 1945년 11월 5~6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최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  

 

 

   3. 해방 2개월 만에 전국조직 건설에 성공!

 

해방 직후 개별 공장에서 산발적으로 출현한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은 노동운동가와 조선공산당의 지원에 힘입어 다양한 지역과 부문으로 퍼져나갔다. 일제하 ‘적색노조운동’으로 끈질기게 저항하였던 저력이 발휘된 것이다. 이 같은 밑으로부터의 움직임은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결집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1945년 11월 5~6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결성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16개 산별노조와 합동노조의 1,194 분회, 21만 7,073명의 조합원을 대표한 51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전체 노동자 대비 조합원 조직률은 10% 이상이었다. 
전평은 출범 당시 산별 단일노조 형태로 출발했다. 이후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마산, 군산, 광주, 목포, 삼척, 전주, 사리원, 원산, 함흥, 흥남, 평양, 성진, 청진, 진남포, 해주, 신의주에 지역평의회가 설치되었다. 이렇듯 산별 단일노조 형태와 ‘지역평의회’ 형태의 이중적 조직구조는 전평 조합원들을 더욱 긴밀히 결속하게 만들었다. 지역평의회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전평은 1945년 12월 즈음에는 223개 지부, 1,757개 분회, 55만3,408명 조합원으로 확장되었다.

 

4. 미군정에 가로막힌 ‘노동자 자주관리’의 꿈

 

하지만 이 같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일제를 대신하여 등장한 미군정에 의해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중도에서 좌절된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소련과 점령정책 기조에서 완전히 달랐다. 38선 이북의 소련은 인민위원회를 내세우는 간접 통치를 선택하였다. 이에 비해 38선 이남의 미국은 조선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면 부정하고, 오직 미군정만이 합법적인 통치 기관임을 내세우며 직접 통치를 하였다.
 미군정은 국·공유 재산과 일본인의 사유재산을 모두 미군정에 귀속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는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남쪽에서 노동자가 주체가 된 공장운영은 제도화되지 못한 채 차츰 소멸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해방정국이 급격한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계기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유엔의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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