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기획연재] 한국노동운동사⑦
등록일 : 2023.02.19
대구폭동-1.png
 공출된 쌀을 지키고 있는 경찰

 

전평 총파업은 9월 말이 되면 대부분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에 의해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대구에서 새로운 항쟁의 불꽃이 일어났다. 이로부터 전평 총파업은 전체 인민항쟁으로 성격이 변화되었으며, 도시에서 농촌으로 투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배경ㅡ 미군정의 ‘쌀 공출 제도’, 민중을 기아로 내 몰아


해방 이후 한반도에 들어선 미군정은 1945년 9월 '미곡 자유화 정책'을 발표한다. 원래 쌀 공급이 모자란 상태에서 갑자기 자유시장이 되니, 돈 있는 사람들의 매점매석으로 쌀 가격이 폭등하여 30배 넘게 오르면서 어마어마한 물가 상승이 발생했다. 


미군정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1946년 1월 다시 일제강점기 때의 공출과 똑같은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였다. 경찰을 총동원하여 일제도 하지 않은 여름 보리 공출까지  집행하였는데, 하곡수집에 응하지 않는 농민들은 투옥시켰다. 이 때문에 청송 지역에서는 200명이 집단으로 굶어 죽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하곡수집과 관련된 미군정청의 이 같은 강압적 태도는 대구 10월 항쟁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다.

 

2. 전평 9월 총파업의 연장선상에서 발생


전평 총파업에 대해 대구지역은 철도파업을 필두로 우편국·섬유산업·출판노조 등이 합세했다. 9월 30일 현재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 총파업은 30여 개 업체 총 4,000여 명이 참여하였는데, 전평의 대구 지역조직이라 할 수 있는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이를 주도했다. 처음 평화롭게 진행되던 총파업은 10월 1일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사태는 단순 파업을 넘어 전면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3. 경찰 발포로 충돌이 격화하다


1946년 10월 1일 오전 10시경 여성과 어린이로 구성된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대구부청(현재의 대구광역시청) 앞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이들을 막아서다가 공포탄을 발사하자 분노한 군중은 그 경찰을 구타했다. 시위대는 경북도청을 거쳐 대구경찰서까지 행진했다. 다른 한편, 1,000~1,500여 명의 노동자들도 별도로 시위를 시작하여 대구역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대구부 투쟁위원회'가 주도한 이 집회는 시간이 갈수록 규모가 불어났다.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했는데, 그러던 와중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2명이 목숨을 잃었다.

 

4. 총파업은 민중항쟁으로 발전


다음날 아침, 노동자 2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군중들은 시내에 집결하였다. 전날 죽은 노동자의 시신이라며 시위대가 시체를 끌고 왔기에 군중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곧 대구경찰서는 수 만여 명 군중에 의해 포위되었다. 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몇 시간 동안 대구는 폭도들이 지배하였다. 배회하는 폭도 무리들은 경찰본서 앞에서의 대규모 소요에 힘입어 외곽의 경찰지서들을 공격하였다. 경찰은 그들의 집에서 공격을 받았고 살해되었다. 군정관리들과 경찰관리들의 집은 폭도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 격심한 공포가 경찰을 사로잡아, 그들은 어떠한 규율도 곧 잊어버렸다. 다수가 사퇴하기를 원하였고 경찰제복과 무기를 버리고 사라졌다.” (미군 제24군 G-2보고서(주한미군 정보보고서) 중)

 

5. 조선공산당 간부였던 박정희 형도 참가 

 

대구폭동-2.png
대구 10.1 항쟁에 앞장 섰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박상희. 박정희의 셋째 형이다.


훗날 군사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의 형이자 박근혜의 큰아버지인 박상희도 이 사건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박상희는 선산군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겸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 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선산지국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신간회에도 관여한 상당한 민족주의자·독립운동가였다. 구미항쟁 지도자였던 박상희는 10.1 항쟁 진압과정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6. 계엄령 선포로 대구는 일단 진정됐지만…


폭동이 일어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미군 탱크와 장갑차는 그대로 시민들을 밀어붙여 거리를 봉쇄했다. 미군정은 대구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던 경상도 지역 출신 경찰들을 철수시키고, 수도권에서 새로 경찰간부 인력을 차출하는 한편 경남 지역에서 진압 경찰관들을 증파하였다. 10월 1일 17시경 미군정은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비조직적으로 터져 일어났던 민중봉기는 이내 가라앉았다. 휴업과 파업은 10월 3일까지 이어지다 10월 8일 대구의 파업 노동자들이 공식적으로 직장에 복귀하면서 완전히 종료됐다. 하지만 항쟁은 영창과 인근 농촌 지역으로 번져나가면서 더욱 거세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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