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ㅡ '전전 일본 정당정치'의 좌절에서 배운다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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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굴러가고 있을까? 야당인 민주당이 2009년 총선에서 '55년 체제'로 불리는 자민당 1당 장기집권의 철옹성을 깨고 집권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그런 기대가 충만했었다. 보수와 진보를 축으로 하는 양대 정당이 유권자의 선택에 따라 교대로 집권하는 양당제 입헌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불과 3년 만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자민당이 2012년 총선에서 정권을 탈환한 뒤, 55년 체제보다 더욱 강고한 '제2의 55년 체제'가 들어섰다. 공명당과 연립한 자민당 정권은 정권 재탈환 이후 선거 때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면서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모두 3분의 2를 넘는 의석을 확보한 채,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다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회당이 만년 야당이면서도 언제든지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억지력을 가졌던 55년 체제가 그리울 정도로 지금 일본의 야당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지금 일본에서 양당 교대 집권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됐다.

2대 정당의 교대 집권이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고 본다. 2대 정당이 교대 집권하는 체제에서는 각 정당이 서로 경쟁 당에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유권자를 의식하는 정치를 해야 하다. 유권자를 의식하고 유권자를 위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2대 정당의 교대 집권이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2의 55년 체제기'에 들어선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일본의 정당정치는 왜 무너졌을까>(소명출판, 미쿠리야 다카시 지음, 윤현명 옮김, 2023년 4월)라는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 이 책이 요즘 일본 정치가 당면한 문제를 다룬 책인가 생각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지금의 일본 정치를 다룬 책이 아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싹튼 정당정치가 왜 무너졌는가를 규명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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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일본의 요즘 정당정치, 더 나아가 한국의 정당정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오히려 관찰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얼기설기 얽혀 있는 당대 정당의 연구보다, 정당정치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를 더욱 객관적으로 선명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눈을 제공해 준다. 

미쿠리아 다카시는 일본 정치사를 전공한 도쿄대 명예교수다. 요즘도 일본 매스컴에 자주 나와 일본 정치와 관련한 해설과 분석을 하는 유명한 정치 분석가다. 이 책은 2017년 8월 문춘문고가 출판한 <정당정치는 왜 자멸했는가>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전전에 출현했던 일본의 2대 정당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만주사변을 계기로 전전의 일본 정당정치가 붕괴된 시점부터 거꾸로 거슬러올라가며 서술하고 있다. 저술 수법이 광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연출 방법과 흡사하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정당이 어떻게 출현했고, 누가 주도했는지를 알려면 일본 근대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에 관한 세세한 얘기는 책에도 잘 나와 있다. 흥미가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정보를 보충하면서 보면 흥미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먼저 1장(스스로 무너지는 거대 양당)에서 1930년대 초반 일본의 2대 정당(입헌정우회와 입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정당정치가 자신들의 세력 강화를 위해 군부를 끌어들이면서 자멸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두 정당은 정책에서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각기 강경 외교(입헌정우회)와 협조 외교(입헌민주장)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군부의 중국 대륙 및 만주 침략이 이뤄지고 정우회가 상대당을 공격하기 위해 군부를 끌어들였고, 이를 계기로 군부가 정당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됐다. 미쿠리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두 당이 서로 상대를 공격하고 비난하기 위해 군부를 끌어들임으로써 스스로 목을 졸랐다.

이후의 장(2장 '정당 내각의 빛과 그림자', 3장 '정당과 번벌의 협력', 4장 '이념 없는 정당의 혼란')에서는 시간을 역순으로 쫓으며, 1장에서 말한 정당의 자멸 원인과 배경을 살핀다.

요약하면, 메이지유신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의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 반번벌 세력 중심으로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났다. 그 영향으로 제한적으로나마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됐다. 1918년 최초의 정당 내각이자 평민 내각인 하라 다카시 내각의 탄생과 1925년 보통선거 실시가 그 최대의 결실이다.

그러나 번벌세력, 원훈세력의 견제 속에서 어렵게 탄생한 정당정치는 정착하지 못하고 좌절했다. 정당이 본연의 일, 즉 국내외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 정권을 유지하고 획득하는 데 더욱 열중했고 그 과정에서 정당 간의 갈등‧부패가 커다란 문제로 떠올랐다. 1920년대 후반 들어 일본이 대외적으로 세계 대공황과 국제경제의 블록화, 대내적으로 기업‧가계의 파산이라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일본 국민들은 정당이 그런 난국을 타개할 힘도, 역량도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결과 1장에서 보는 것처럼,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과 함께 정치의 대세는 정당에서 군부로 넘어갔다. 이후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정당정치는 소멸했다.

이 책은 역자 후기를 포함해 150쪽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얇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허지만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강하다. '민중의 삶을 살피고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정당은 망한다', '주체적인 역량을 키우지 않고 외부의 힘에 의존해 생존하려는 정당은 망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런 교훈은 일본의 정당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당에도 똑같이 해당할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에서도 주체 역량을 키우기보다 군대에 의존했다가 망한 정당이 있었고, 지금은 군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검찰에 의존하는 정당이 발호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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