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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이 원하는 그림 위해 붓을 든 '길바닥 화가' 이하 
민병래 ('황소와 나비' 대표)
등록일 : 2023.03.26

 

미국 유학의 좌절, 예술가의 길

 

이하는 경희대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하고 청주의 한빛일보에서 시사만화를 그렸다. 플래시프로그램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세상이 오면서 2000년에 관련 회사로 이직했다가 여기서 익힌 기술로 '여우비'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당시 광고회사는 10컷 화면으로 영상의 샘플을 만들어 광고주 앞에서 설명회를 했는데 그가 만든 회사는 30초짜리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줬다.

 

이게 대박이 나면서 일이 밀려들었다. 사무실을 집 삼아 일했다. 잠자리는 야전침대, 식사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컴퓨터 앞에서 컵라면으로 때웠다. 이게 사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어느 날 모은 돈을 들고 뉴욕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SVA(school of visual art)라는 영상전문대학에 도전했다. 1년여 어학연수를 하며 시험을 치렀는데 결과는 낙방.

 

시험은 떨어졌지만 뉴욕생활은 큰 경험이었다. 이하가 즐겨 걸은 길은 뉴욕 맨해튼 14번가의 유니온스퀘어 공원. 이곳은 거리 예술의 성지였다. 나이프로 유화를 그리거나 캔버스에 목탄으로 직접 칠하는 여러 예술가를 접했다. 그래픽으로 작업해 디지털프린팅으로 출력하는 새로운 기법까지. 이하는 흠뻑 빠져들었다.

 

더럽기로 유명한 뉴욕지하철이지만 곳곳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할아버지, 트럼펫을 애잔하게 부는 흑인 등을 만났다. 길거리엔 공연이 넘쳐나고 해마다 3월부터 열리는 아트페어 시즌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눈 호강을 했다.

 

비록 영상대학은 떨어졌으나 뉴욕은 이하의 예술혼을 자극했다. 그는 먼저 공모전에 기웃거렸다. 시사만화를 그릴 때 익힌 풍자의 감각에 뉴욕의 체험을 더해 <꽃미남 탈레반 병사>를 출품했다. 이게 어떤 큐레이터의 눈에 띄어 전시회 제안을 받았다.

 

1년간 열심히 준비해 오바마, 버냉키, 무바라크, 김정일을 소재로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와 <꽃미남 병사 시리즈>를 준비해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장이 통창인 1층이고 카다피가 대형걸개로 내걸려 많은 행인이 들어왔다. 작품도 여섯 개나 팔리고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이하는 그때 '혹시 나 천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로 돈을 벌 수 있음에 신이 났고 들떴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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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전시회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 뉴욕에서 열린 이 첫번째 전시회는 대성황이었다. ⓒ 이하제공

 
 
전시회가 끝날 무렵 루마니아 난민인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그는 이하에게 차우셰스쿠 때문에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조국을 등져 뉴욕 거리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연을 들려줬다. 전시장을 나서며 "차우셰스쿠도 그려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세상이 자기 가족의 고통을 알아주고 이하의 그림을 통해 독재자가 고발되길 원했다.

 

이하는 전시회 일정에 쫒기는 바람에 시선을 끌 수 있는 소재로 독재자를 그렸을 뿐이었는데 당황했다. 루마니아인과 더듬더듬 영어로 얘기를 나눴지만 그는 "내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하에겐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그때 세상이 원하는 그림, 시대가 바라는 이미지를 위해서 살겠다, 라는 마음이 싹 텄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땅 어디든 그림판으로 삼아 뉴욕의 예술가처럼 길바닥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키웠다. 그 마음이 처음으로 표현된 게 바로 이명박 그림이었다.

 

2010년부터 거리의 화가 노릇을 하며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른 이하는 어떻게 먹고 살며 작품 활동을 이어온 걸까? 서울 정릉에 있는 작업실 겸 살림집 월세만 해도 65만 원이다. 재료값도 적지 않게 들 터인데.

 

다행히 그에게 빼어난 재주가 있었으니 바로 용접이다. 경희대 조소과 대학원을 다닐 때 석고나 철을 깎고 이어붙이다 보니 끌이나 망치는 기본이고 용접 또한 익혀야 했다. 돈이 필요하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서 용접 일당을 뛰었다.

 

용접 일은 하루종일 쪼그려 앉아서 하는 데다가 불볕더위에도 방호복을 입고 2000도 가까운 열기를 받으니 체력소모가 많았다. 그나마 경찰에 불려 다니고 재판에 나가다 보니 제대로 뛰기도 어려웠다.

 

요즘에는 술집이나 식당의 인테리어 일을 틈틈이 도와준다. 그 외, 그의 그림으로 만든 머그컵이나 액자 같은 소품을 쇼핑몰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 조금씩 팔고 있다. 그래봐야 푼돈. 고정수입은 7명의 후원회원이 매달 10만 원씩 70만 원을 모아준다. 이름하여 '이하기금'. 대신 그는 후원회원들에게 석 달에 한 번씩 그림으로 보답을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 2탄 준비

 

경찰 조사를 마친 이하에게 남은 건 검찰조사, 용산 대통령실의 하명수사가 분명하니 검찰이 어떻게든 기소를 할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하는 지금 2탄을 준비 중이다.

 

1탄의 그림이 윤석열과 김건희를 공동주연으로 했다면 2탄에는 법사가 우정 출연하고 새마을기와 일장기가 소품으로 등장한다. 이미지는 완성되었고 이번에는 조명을 곁들여 연출할 작정이다. 이를 위해선 약간의 군자금이 필요한데 11월경 '목돈'이 들어올 예정이어서 그때를 준비하고 있다.

 

이하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게 '옥외광고물법'과 '경범죄처벌법'이다. 그의 그림 어디에도 상호나 상표가 없다. 물론 상품도 없다. 돈을 벌려고 그림을 붙인 게 아닌데 광고물법으로 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설령 옥외광고물법에 저촉되더라도 어찌 이 법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막으려 한단 말인가?

 

경범죄처벌법도 마찬가지다. 그가 골목길에 소피를 본 것도 아니고 술 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다. 경범죄를 끌어다 예술과 창작을 옥죈다면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 아닌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엔 저항하는 예술가를 탄압할 때 반공법이나 국보법을 휘둘렀다. 지금은 차마 이적표현물이란 조항을 적용할 수 없어서일까, 너무 좀스럽고 구질구질하게 법기술을 부리고 있다.

 

이하는 길바닥 화가로 살아오면서 연행되고 불려 나가고 여섯 번이나 기소되었다. 심리와 판결을 받느라 법정에 선 건 수십 번. 창작에 몰두하기에도 벅찬 데 심신이 피로했다.

 

더욱 괴로웠던 것은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의 공격, 이들 시위에서 어느 날부터 이하는 공적이었다. 어떻게 핸드폰 번호를 알았는지 상상할 수 없는 욕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민중미술의 선배로부터 이어받은 저항정신으로 버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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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 예술가 이하 그의 집 앞이다. ⓒ 민병래


 
그러면서 이하는 자신의 장르를 열었다. 이하에겐 거리 곳곳이 캔버스이고 담벼락과 버스정류장, 선술집이 전시장이다.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건 보라색. 그는 보라색을 고귀하고 품격있게 쓰지 않는다.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에게 덧씌워 음산한 이미지를 빚어낸다.

 

일러스트와 포토샵 프로그램을 사용하기에 사진과 그래픽을 섞기도 하고 디지털프린팅으로 출력해 아크릴이나 다양한 재료를 입혀 입체감이나 광택 효과를 낸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이미지를 시트에 출력해 우드락에 붙인 것이다. 정치풍자의 대상 또한 제한이 없어 아베는 단골 소재다. 스파이더맨과 로봇도 불러내 감칠맛도 있으니 그의 화폭에는 실험정신이 꿈틀댄다.

 

이하가 걸어가는 길은 예술의 길 창작의 길이면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길이었다. 그 길에 이하가 홀로 외로워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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