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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  윤세주

 

 

 김원봉의 지혜주머니이자 평생 동지


윤세주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호는 석정(石正)이다. 지난 호 소개했던 약산 김원봉의 동향 사람으로, 두 살 위인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다.
석정 윤세주는 밀양 중학 시절 전홍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슬프고 또 언제나 참담하다.”는 훈화를 평생 가슴에 간직했다. 
석정은 일찍이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몰래 빼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수백 매씩 인쇄하여 거사일인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장터에서 소리 높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19세였던 석정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일경의 수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는 궐석재판에서 밀양 만세운동 관련자들 가운데 가장 중형인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의열단활동,  체포,  국내  신간회활동


중국으로 건너간 석정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마침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원봉과 재회하여 1919년 11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석정은 의열단 제1차 암살 파괴 계획(1920년) 당시 국내 침투 공작을 맡았다. 식민통치의 심장인 조선총독부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질 계획이었는데, 불행히도 거사를 앞두고 경기도 경찰부 김태석에게 피검되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1927년 출옥한다. 그는 감옥생활 동안 철저한 자기수련과 독서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식견을 넓혔다. 출옥 후 26살이 된 그는 곧바로 밀양청년회 활동과 신간회 밀양지회 건설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의열단 주요 강령]

 -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근본적으로 타도하고 조선민족의 자유독립을 완성할 것.
 -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세력을 잔제(剗除)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립할 것.
 -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을 건립할 것.
- 민중경찰을 조직하고 민중의 무장을 실시할 것.
- 인민은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ㆍ주거에 절대 자유권이 있을 것.
- 인민은 무제한의 선거 및 피선거권이 있을 것.
- 일군(一郡)을 단위로 하여 지방자치를 실시할 것.
- 여자의 권리를 정치ㆍ경제ㆍ교육ㆍ사회상에서 남자와 동등으로 할 것.
- 의무교육, 직업교육을 국가의 경비로 실시할 것.
- 대주주의 토지를 몰수할 것.
-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빈고(貧苦) 농민에게 토지, 가옥 기구(器具) 등을 공급할 것.
- 공인(工人) 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노동평민에게 가옥을 공급할 것.
- 대규모의 생산기관급 독점 성질의 기업(철도ㆍ광산ㆍ수선ㆍ전기ㆍ수리ㆍ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할 것.
- 소득세는 누진율로 징수할 것.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편성, 팔로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다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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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계림에서 찍은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1939.10.10) 기념 사진

 

석정은 이후 부친이 죽은 뒤 1932년 두 번째 중국망명 길을 떠났다. 남경으로 간 그는 김원봉 등 의열단 옛 동지들과 다시 만났는데, 과거 활동을 평가한 의열단의 옛 동지들은 개인 테러 대신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수행하기로 결의하고, 1932년 10월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 아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개설하였다. 석정은 이 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했으며 졸업 뒤 교관으로 발탁되어 2기생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론에 밝았던 그는 조직론, 한국민족해방운동사, 의열단운동사, 유물사관과 유물론 철학, 정치경제학 등 운동사와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다. 석정은 김원봉과 함께 1938년에 군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거기서 정치위원직을 맡았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는 종래의 선전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직접 전투에 참가할 것을 결의한다. 그리하여 활동지역을 조선인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화북과 화중지역으로 옮기고 적 후방에서의 공작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1941년 4월 김원봉과 헤어진 윤세주는 박효삼과 함께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 갔다. 명칭도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국민혁명군 팔로군(중국공산당 군대)과 함께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1942년 6월 3일 태항산에서 일본군의 대대적인 소탕전에 맞서 반소탕전을 전개하다 석정은 42세의 아까운 젊은 나이로 전사한다. 
그의 시신은 처음 태항산맥 연화산 자락에 팔로군장으로 치러져 안장되었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첫 번째 개장한 국립묘지인 허베이성 한단시 진기로예(晉冀魯豫) 열사릉원으로 이장되어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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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태항산에 있는 석정 윤세주의 묘(뒤에 중국 혁명 열사릉으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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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열사릉에 있는  석정 윤세주 열사  묘. 

 

석정을 스승처럼 따랐던 이육사 시인


석정 윤세주가 밀양에서 신간회와 중외일보 기자 등 언론활동을 할 때 대구에서 똑같은 활동을 하던 이육사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함께 남경으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을 만나고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으로 졸업한다. 간부학교 생도시절 이육사와 석정은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폭발물 취급 및 투척법, 요인 암살 등 군사 실기를 함께 공부했다. 졸업 후 이육사는 국내 침투 임무를 부여받아 귀국했고, 석정은 간부학교 교관이 되어 중국에 남았다.
이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것은 1939년에 지어진 ‘청포도’일 것이다. 이 시에서 나오는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곧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민족 해방의 조건이 성숙하고 있으며, 일본의 식민지배도 머지않아 끝장난다는 뜻이다. 그 선봉장이 바로 석정 윤세주인데, ‘청포도’는 육사의 석정에 대한 그리움과 신뢰를 표현한 것이었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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