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4.3 제주 항쟁’(2)
등록일 : 2023.01.19

■ 운명의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반도는 당시 정치적으로 분단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5.10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봉기를 조직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하는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350명 무장대는 사전에 지목해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 집을 습격했다. 

 

■ 평화협상 의도적으로 파괴한 미군정


제주도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과 토벌대 사령관 국방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중령 간에 평화협상이 4월 28일 지난한 노력 끝에 성사되었다. 하지만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은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여 소위 ‘오라리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무장대 소행인양 꾸몄다. 미군정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하늘과 땅에서 입체적으로 이 장면을 촬영했다. 필름은 곧바로 「제주도의 메이데이(Cheju-Do May Day)」라는 선전용 기록영화로 각색되어 각지에서 방영 되었다. 5월 3일 미군정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으로써 협상은 깨졌다. 토벌대 사령관도 그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인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구 일본군 소위 출신으로 미군정 장관 딘 소장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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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은 같은 동족이 동족을 학살한 최대 사건이다.

 

■ “해안선으로부터 5KM”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들을 하루빨리 제거하려 했다. 미군정 역시 1948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어 마찬가지로 조급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선택한 건 평화가 아닌 ‘완전 섬멸’이었다.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가 새로 설치되었다. 부하에게 암살당한 박진경 후임으로 부임한 토벌사령관 송요찬은 무시무시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라.” 

 

■ 무장대와 주민 간의 눈물겨운 유대


당시 무장대와 주민 간의 유대가 얼마나 끈끈했는지는 다음 증언을 보면 알 수 있다.
“초가을이 되자 산 부대의 식량조달이 곤란해져 마을에서 약탈하거나 하게 되지만 그때까지는 마을의 어머니들, 주로 산 부대에 가족이 있는 어머니들이 ‘오줌허벅’ (비료용 소변을 담아 운반하는 둥근 옹기항아리)에 보리나 조를 넣어 경비대의 감시 눈이 빛나고 있는 가운데를 지나 소변과 같이 뿌리고 돌아갑니다. 그걸 산부대가 와서 밤에 긁어가는 거예요. 웬만한 유대가 없으면 그런 일을 목숨 걸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산부대에 대한 공감은 그 정도로 강한 것이었어요.” (김시중, 당시 19세)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중산간 지대뿐만 아니라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애당초 군경이 파악했던 무장대는 불과 500명 정도였지만,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무려 3만 명을 희생시켰다. 미군정과 이승만 친일세력이 사람 목숨을 얼마나 파리 목숨처럼 취급했는지 알 수 있다. 

 

“ 4.3 항쟁 주체들이 애초 요구한 것은 ‘분단 반대, 전쟁 반대’였다. 
 3만 명 양민학살이 미군 지원 하에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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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의 유족들은 해당 참사에 관한 미국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2019.4.3. 미국 대사관 앞)

 

 

■ 교훈 ― ‘4·3’은 현재 진행형


 4.3 항쟁 주체들은 애초 “분단 반대, 전쟁 반대”를 외쳤다. 그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한반도는 지금 세계에서 전쟁 가능성이 가장 높은 땅이 되었다. 4.3 항쟁은 또한 미군정 하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였으며, 한 때 제주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을 완전 봉쇄함으로써 제주도민을 ‘독 안에 든’ 신세로 만들었다. 

 

검정고무신 


 박용우


어린 동생이 끌려가던, 길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눈물로 던진, 길이었다

여기다, 여기다 하며 두려움이 떨어뜨린, 길이었다

누이가 주워 가슴에 품고 가는, 길이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날,

까마귀도 종소리에 숨죽인, 길이었다

섯알오름에서 노을이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길이었다

땅 밑에서 고구마가 굵어지고

땅 위에서 고구마 꽃이 자주 빛 울음을 터뜨리는, 길이었다

누이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막고

초경을 앓던, 길이었다

동생에서 누이에게로 흘러내린 붉은 핏줄기가

상모리(上慕里) 불타는 골목마다 비린내를 몰고 가는, 길이었다

 

- 제5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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