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역사와 사람의 숨결을 느끼며
허영구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록일 : 202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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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마치고 장마철이지만 잠시 비가 멈춘 날 오후 두 달여 만에 다시 수성동계곡을 통해 석굴암을 거쳐 인왕산에 올랐다. 바람 한 점 없고 무더운 구름이 짙게 깔린 날 낡은 글씨로 ‘경남지물’, 대동 간판 유리‘, 세련된 글씨로 ’서촌의 봄‘, 서촌 정자 앞 낮 술집’이 함께 보이는 통인시장을 출발한다. 등산로 입구를 향해 조금 걷자마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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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시장

 

복개(원래발음은 덮을 ‘부’로 ‘부개’)공사로 만들어진 길 양 옆으로 낮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머리까끼’라는 이름의 미용실간판을 보며 서촌의 오래된 이야기를 느끼는가싶었는데 건너편에 ‘윤동주 하숙집터’가 보인다.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 민족시인 윤동주의 자취가 남아, 1941년 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재학중이었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는 소설가 김송이가 살던 이 집에서 하숙생활, <별 헤는 밤>, <자화상> 그리고 <또 다른 고향> 등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짐, 아쉽게도 당시 집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고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에서 시인의 흔적으로 만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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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옮기자 특이하게 만든 빨간 우체통이 붙은 ‘푸른 양귀비’라는 이름의 고색창연한 건물이 보이고 2층은 ‘ANGRY ARTS'이다. ’화(성)난 예술일까, 격렬한 예술일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을까? 석굴암 오르는 길, 불국사를 지나칠 수 없다. 언덕바지에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 현수막과 함께 조계종 소속 ‘불국사’다. 서울 종로에도 석굴암과 함께 불국사가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수성동(水聲洞) 계곡이다. 성을 쌓고 지키는 수성(守城)이 아니라 계곡의 물이 흐르는 소리, 특히 장맛비 내린 후 쏟아지는 물소리를 따서 붙인 것일까, 아니면 하늘의 수성(水星)처럼 반짝이는 별빛 같은 물소리를 형상화 한 것일까?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그의 형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참혹하게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때 목숨을 걸고 단종에 신의를 지켰으며 이 곳에 ‘비해당(匪懈堂, ’비해‘는 ’게으름 없이‘라는 뜻)’을 짓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200여년 후 태어나 진경산수화의 거장이 된 겸재 정선이 그 동안 이 곳에서의 수많은 그림의 총아로 ‘수성동’을 그렸으며 그가 떠난 지 264년이 흘렀다. 하늘의 수성도, 인왕동 수성동 계곡물로 흐르고 있다. 조선봉건왕조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도탄에 빠져 허덕였던 민중들은 인왕산 여기저기 석굴과 바위에 마애불과 산신령을 조각하며 아픔을 달래고 혁명을 꿈꿨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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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높지 않은 관계로 짧은 계곡을 지나자 바로 차도와 함께 둘레길을 만나고 석굴암으로 향하는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몇 백 미터 거리지만 수 백 개의 계단을 오르니 등에 멘 배낭조차 젖어든다. 가끔 뒤돌아보면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석굴암에 당도하고 바로 옆 천향암(天香庵)에 이른다. 커다란 바위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바로 위가 정상일 텐데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산신각을 끼고 서울시내와 정상아래 치마바위가 보이는 전망대를 지나 좌측 고개를 넘어 정상으로 향한다. 바위에 산신령이 부조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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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른다. 바위에 이끼처럼 보이는 지의류가 덮여 있는데 화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곧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만난다. 퇴근 후 운동을 하거나 야경으로 보러 오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올라온다. 정상에 서니 광화문을 중심으로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북한산 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작은 봉우리에 당도할 즈음 어둠이 내려앉으며 시내 건물들에 하나둘 전등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서울야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사진 몇 장 찍고 있는 데 산 모기들이 달려든다.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내려간다. 불빛 조명과 함께 인왕산 구간의 한양도성이 이어진다. 다시 경복궁전철역 근처로 원점회귀다. 세종이 통인시장 근처에서 태어난 탓에 이 일대는 세종마을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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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에 있는 ‘체부동잔치집’에 들러 냉 콩국수, 뜨끈한 잔치국수, 김치전에 광화문막걸리로 목도 축이고 배도 채운다. 가게 안 벽에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정치인들의 사인이 붙어 있다. 테이블마다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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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전철을 타러 지하로 내려오는데 벽면에 세종마을명소 안내판이 붙어 있다.

 

“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준수방, 인달발, 순화방, 웃대, 우대, 상대마을(上村)이라 부름, (북촌과 달리) 중인과 서민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세종대왕의 생가터, 백사 이항복의 집터가 있음, 옥계시사(백일장)이 열리고, 겸재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추사김정희의 명필이 탄생한 마을, 근현대사에서는 이중섭, 윤동주, 이상, 박노수 등이 거주하여 문화예술의 혼이 이어졌고 현재 600여채의 한옥과 골목, 전통시장, 소규모갤러리, 공방 등이 어우러짐, 2010년부터 ‘세종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인왕산 산행길, 수없이 지나치면서도 보이지 않았던 역사와 사람의 발자취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489회, 인왕산, 2023.7.1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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