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구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록일 : 2023.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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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997 날치기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투쟁

 

[민주노총이 선포한 7월 총파업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울산함성은 노조간부와 조합원 그리고 활동가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성공적인 총파업 사례로 손꼽히는 96-97 노개투 총파업과 관련한 기사를 게재한다. 본문은 2012년 1월 18일 있었던 토론회 <96-97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현재적 의미와 과제>에서 발표된 두 편의 발제문이다. 총 4차례에 걸쳐 연재한다.ㅡ 편집자 주]

 

 

3) 역사적인 96/97 노동법개정투쟁 총파업(노개투)

 

 (1) 단계별 총파업

 

1996년 12월 26일 새벽 노동법 날치기에 맞서 민주노총 집행부는 명동성당에서 총파업 돌입 기자회견을 열고 즉각적으로 전국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이미 삭발단식한 뒤 총파업에 대비해 농성을 전개하고 있었다. 노개투 총파업은 전면적 총파업으로 시작했으나 조직적 상황에 따라 여러 단계를 거치며 진행됐다. 
  
 o. 1단계(1996.12.26~ 1997.1.2)  
 12월 26일 오전부터 무기한 총파업하기로 하고 오전 출근 직후 파업출정식, 권역별 규탄집회, 총파업 어려운 사업장은 비상총회 개최, 전교조 단식수업, 화물노련 구간별 안전운행(시속 70Km) 등의 투쟁지침을 내렸다.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의 새벽 노동법 날치기에 맞서 8차 투본대표자회의(12월 23일) 결정에 따라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고 금속‧자동차‧현총련 등 170~180개 노조, 20만 명이 참가했다. 총파업에 대한 국민지지는 50%를 상회했다. 

 

o. 2단계(1997. 1.3~1.14)
8일간의 총파업을 진행한 뒤 1차로 철도 등 공공부문의 경우 연말연시 혼잡을 피해 1월 3~7일까지 잠정적으로 파업을 중단했다. 1월 14일까지 날치기 노동법을 백지화하지 않으면 1월 15일부터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재파업을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총파업은 금속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o. 3단계(1997.1.15~1.19)
1월 15일 총파업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 날 파업에는 388개 노조에 350,856명이 참가했다. 1946년 전평이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일 때 참가했던 24만 명을 넘어섰다. 물론 노동자 대비 총파업 참가자 수는 아직까지는 전평이 가장 많았다. 총파업 참가조합원들은  가두집회 후 가두행진을 벌였고 전국 20개 지역에서 16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김영삼 정권은 백골단을 투입하고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지만 민주노총의 총파업 열기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o. 4단계(1.20~2.28)
25일간의 전국적인 총파업과 가두시위를 벌인 뒤 4단계 국면으로 넘어갔다. 1월 20일부터  2월 18일 이전까지 매주 수요파업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투쟁의 중심에 서 있던 조직들의 피로감이 커졌고 전국적 총파업을 지속할 동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가를 둘러싸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수요파업을 전환하면서 노개투 총파업에 찬물을 끼얹었고 총파업을 무산시켰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설 연휴를 맞은 2월 7~9일은 귀향 등으로 투쟁이 유보되기도 했으나 이 단계에서는 4차례의 전면 총파업을 전개했다. 마지막이었던  2월 28일 총파업에는 107개 노조, 131,448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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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27일 서울 여의도광장에 민주노총 조합원과 대학생 1만여 명이 모여 노동개혁안 철회를 주장하며 총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

 

한 달 넘게 계속된 총파업 과정에서 하루 이상 참여한 노조는 531개, 조합원수는 404,054명에 달했다. 총파업 돌입노조는 누적집계로 3,422개였고 조합원수는 3,878,211명이었다.  1일 평균 총파업규모는 163개 노조, 184,498명이었고 대규모 집회가 30일 열렸는데 집회 참여 총인원은 전국 주요도시에서 150만 명에 달했다. 투쟁과정에서 대국민 선전물은 390만부 제작·배포됐다. 이 숫자는 조·중·동 등 수구보수자본신문들이 하루 찍어내는 숫자에 버금간다. 

 

(2) 노개투 총파업 의의

 

당시 여러 가지 일정으로 노개투 총파업 보고서는 발간하지 못했지만 사업보고서 위원장 머리말*에는 “지난 1년은 모든 역량을 노동법 개정투쟁에 바친 1년...1년 내내 계속된 노동법 개정투쟁은 마침내 건국 후 최초의 전국 총파업 투쟁...세계 노동계를 뒤흔든 정치총파업은 너무 장대하고 위대한 투쟁”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  민주노총, <1996년 사업보고‧자료모음집>, 1997.3.27. 

 

보고서는 총파업의 의의를 ① 건국 이후 최초, 최대 규모 정치 총파업, ② 노동자 생존권과 노동기본권, 민주주의 쟁취 정치투쟁, ③ 총자본의 세계화, 신보수주의 공세에 맞선 투쟁으로 세계노동자의 연대와 지지투쟁을 들고 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최초는 전평의 총파업이 돼야 할 것이고 최대 규모 역시 노동자 숫자 대비 총파업 참여자수를 기준으로 하면 최대 규모 역시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세계화’와 ‘신경제’로 표현되었지만 신자유주의에 맞선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은 국내외를 통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민주노총의 노개투 총파업이 전 세계 주요뉴스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진작 우리 스스로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결국 1997년 말 IMF 외환위기와 1998년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제대로 맞선 제대로 된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3) 노개투 총파업 성과

 

노개투 총파업의 일차적인 성과는 국회에서 통과되고 대통령이 서명한 법률을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폐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세계적으로도 혁명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보고서는 노개투 총파업의 성과를 ① 날치기 노동법 저지, 법개정‧구속철회  등 정권의 후퇴 이끌어 냄, ②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확대‧강화하고 산별노조 건설 토대 구축, ③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 강화, ④ 조합원 정치의식 강화, 노동자를 민주주의 투사로 각인시켜 정치세력화 토대 만듦, ⑤ 노동자 총파업 투쟁이 범국민적 투쟁을 선도하고 투쟁의 확산을 가져옴, ⑥ 강‧온 겸비한 투쟁전술과 다양한 투쟁형태의 개발과 전술에 있어 풍부한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노동법 투쟁의 성과는 일차적으로 노동악법을 폐기시키고 개정하는 것과 악법제정 시도를 막아내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진행 중인 민주노총의 노동법 개정 투쟁이나 한미FTA폐기투쟁에 대한 인식을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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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연구원이 2021년12월14일  노개투 25주년 기념 민주노총 총파업의 진단 및 과제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4) 노개투 총파업의 한계와 향후 과제

 

노개투 총파업은 많은 성과를 낳았음에 불구하고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현재적 시점에서 보면 정리해고를 저지하기 위한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였던 민주노총이 결국 1년 만에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노개투 총파업 투쟁의 주요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자본(전경련, 경총)은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부터 자본의 세계화에 발맞춰 지속적으로 노동법 개악을 추진했다. 1996년 자본이 노개위를 통해 공격적으로 제기한 노동법 개악안은 96/97노개투 총파업으로 일시 주춤했으나 1998년 김대중 정권 하의 1기 노사정위원회와 2003년부터 시작된 노무현 정권의 노사관계로드맵과 비정규직 악법 그리고 2010년 이명박 정권의 타임오프와 복수노조창구단일화 등을 통해 완성됐다. 

 

이는  세계정세변화에 대해 둔감했고 투쟁의지 부족과 조직적 준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이 코앞에 존재하는 한 일시적으로 전투가 중단될 수는 있어도 전쟁은 계속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한계와 향후 과제를 ① 조직력과 투쟁력에 있어 결정적인 위력 부족 : 1995년 말 현재 노조조직률 16.5%,165만 명 중 민주노총 50만 명이 23일 간의 총파업, ② 노동자 정치역량의 한계 : 여당 우위, 야당 지역정당화와 보수화, ③ 범국민운동 강화되었으나 민주노총 결합도 취약, 명실상부한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함, ④ 조직간 편차 드러났고, 탄압에 대한 대처 부족 : 파업참가 조합원 수는 81.1%였으나 노조 수는 60%, ⑤ 파업전술과 지도력, 내용 부족 : 파업이 노동자 학교로서의 정치투쟁과 의식고양에 한계, ⑥ 정치적으로 각성된 열성간부, 조합원들을 단련시킬 사업과 틀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향후 과제는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총의 혁신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동안 여러 차례 노동운동발전 전략을 위한 모색이 시도되었으나 아직 완성된 그림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총은 점점 더 후퇴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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