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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1일 민주노총이 개최한 “노조탄압 중단과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악 중단, 노조법 2.3조 개정, 윤석열 정권 퇴진!” 총력투쟁 대회 모습

 

 

 

민주노총이 선포한 7월 총파업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이에 <울산함성>은 한국노동운동사에 있어 성공적인 총파업 사례로 꼽히는 96-97 노개투  관련한 글을 소개한다. 본문은 2012년 1월 18일에 있었던  <96-97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현재적 의미와 과제> 토론회에서 발표되었던  발제문이다.  비록 1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핵심 내용은 여전히 참고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분량이 다소 길기에 총 4회로 나누어 연재한다.ㅡ 편집자 주

 

 

[발제 2]      96-97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그 의미와 과제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

 

(중략)


3. 총파업투쟁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던가?

 

노조운동과 투쟁을 전개하는 활동가, 간부들의 꿈은 위력적 총파업투쟁과 그를 통한 승리이다. 그런 취지에서 노개투 총파업투쟁은 항상 기념비적인 투쟁으로 기억되고, 이후의 총파업투쟁의 모범이자 원형으로 기억된다. 이후 지속적으로 민주노총은 총파업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아래 표1 참조), 한 번도 당시의 위력적 참여, 완강한 투쟁, 민중적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는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총파업투쟁의 모범을 따라 배우고,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그 투쟁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도록 조직화가 가능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구체적 실천과 조직화의 과정이 생략된 채 총파업선언만으로 총파업 투쟁이 위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총파업투쟁을 승리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2월 대의원대회에서부터 조직적 결의가 시작되었다. 노동법개정투쟁의 목표를 수립하고, 7월 19-21일 단위노조 대표자수련대회의 결의를 모아 7월 30일 중앙위원회에서 총파업 및 총력투쟁의 결의를 하고 10월 10일 대의원대회에서 총파업의 결의를 다시 한 번 하였다. 또한 조합원 교육과 참여에도 만전을 기하였다. 중앙차원에서는 노동법개정투쟁을 위한 교육 실천지침으로 투쟁교안, 현장 실천방안, 대자보 자료 모음 등을 묶은 ‘노동법개정, 올해는 반드시 이뤄냅시다’ 등 3종의 교육지침을 발간하여 단위사업장에까지 배포하였으며, 8월 20일부터 10월말까지 2달 남짓한 기간 동안 중앙 차원에서 기획한 순회강연회도 21개 지역에 약 2,000명이 참가할 정도의 대중적 참여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업장에서 산별, 지역의 지침에 따라 1노조 1교육이 자체적으로 실시되었다. 비디오, 만화소책자 등도 발간되었다.

 

   이뿐 아니라 대국민선전을 위해 노동법개정투쟁 승리를 위한 지하철대자보 6회 12종 시리즈물로 하여 지하철, 병원, 한국통신, KBS, 의보, 공노대 사업장, 기차역, 터미널, 공단 등에 부착하였다. 내용들을 보면, 국민적 감성에 호소하면서 노동법개정투쟁의 필요성을 느껴지게 만들었다.
 
   - 1회 : 월급쟁이가 위험하다/경제위기, 주범을 잡아라!
   - 2회 : 댁의 자녀는 몇 등입니까?/ 급구, 죽어라 일만 하실 분
   - 3회 : 일 할맛 나지 않습니다/재벌, 단물만 삼킨다
   - 4회 : 노사개혁, 제대로 합시다/민영화 칼바람, 가계부 찢는다
   - 5회 : 돈 없으면 아프지 마/공기업, 희망은 있다.
   - 6회 :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해고통지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 12월2일 발행
       10년 전 그 날처럼 - 97년 1월4일 발행 

 

  조합원용 대자보 4종과 더불어 총파업 직전까지 대국민선전물, 스티커 등도 다수 작성 배포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총파업 관련 대국민선전물만도 390만부가 배포되었다


   각 연맹과 지역본부에서도 단위노조에 대한 지도에 철저히 임했다. 일례로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인 전문노련의 노동법개정투쟁 진행점검에는 각 노조별로 상집 대의원 교육, 조합원 교육, 현수막, 리본달기, 순회방문, 농성참가, 노동자대회 참가자 수, 쟁의발생결의 총회 또는 대의원대회, 신고, 실천단 조직, 기금 마련 등을 일일이 점검하는 등 각 조직별로도 최선의 집중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또 거의 모든 노조가 참여한 가운데 투쟁기금도 1억 2천만 원 넘게 모을 수 있었고, 조합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2만 통 넘게 발송하기도 했다. 당시 조합원이 불과 2만 5천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표 1> 민주노총이 수행한 총파업투쟁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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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민주노총 사업보고서 각년도. 


  
 10.11일부터 11월9일까지 쟁의발생결의에 338개 노조 268,444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였으며 참가 조합원의 투표율은 평균 83.4%, 찬성률은 87.63%였다. 또한 가맹산하조직별로 단위노조까지 노동법개정투쟁본부를 구성하고 ‘노동법개정투쟁실천단’을 구성하여 리본달기, 조합원교육, 선전전, 체육대회, 프랭카드 부착 등 조직실정에 맞는 실천을 전개하였다.


   중앙차원의 지도부의 선도적 투쟁도 전개되었다. 권영길 위원장의 무기한 단식농성이 11월 4일부터 전개되었고, 12월 16일부터는 임원, 산별, 그룹조직 대표자 17명이 명동성당에 삭발농성에 돌입하고, 각 조직별로 비상대기 농성에 돌입하였다. 단위노조는 즉각 파업에 돌입할 수 있도록 파업투쟁 체계를 유지하였으며 23일 투본대표자회의에서는 연내강행 처리 가능성이 높은 바 24일부터 비상대기와 파업투쟁 대비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교육, 선전 등의 조직화와 투쟁들을 통해 총파업 결의와 조직화를 드높였다. 
 
   최근의 민주노총 파업은 충분한 결의와 대중적 교육, 선전 등 주체적 노력 없이 일방적 선언이나 상층의 결의만으로 추진되는 측면이 많다는 점에서 노개투 총파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충분한 논의와 결의, 조합원에게 다가가는 대중적 교육, 선전, 집행점검 등의 노력 없이 선언적 총파업에 의존해서는 위력적이고 실질적 총파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지도부와 현장의 대중적 민주적 결합, 진정성, 열정이 당시에는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크리스마스 새벽 6시에 강행된 날치기 사태를 입수한 지도부의 고민에 대해서 판단해본다면, 날치기에 대한 즉각적 총파업이 가능한가가 총파업 성공의 결정적인 관건이었다. 총연맹지도부의 고민전화에 기아자동차노조가 바로 즉각 총파업에 돌입할 수 있다는 결의를 밝히고 바로 새벽 7시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하고 지도부가 농성하는 명동성당으로 수천 명의 조합원들을 집결시키고, 이를 받아 현대자동차가 오후 1시 전면파업에 돌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 총파업의 성패에 결정적이었다. 한국의 대규모 전략사업장으로서 완성자동차가 우선 파업에 돌입하면서 나머지 노조들에게 결정적 선도부대의 노릇을 하였으며, 지역 가두투쟁과 행진을 선두하였으며 이것이 다음 해 1월말까지 이르는 긴 총파업 투쟁의 핵심적 승리의 열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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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비정규직지회가  2012년 8월 16일 사측이 제시한 누더기 주간연속2교대제안과 비정규직안에 맞서 8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현대차 본관 앞에서 연좌 농성을 하고 있다.

 

 

셋째, 노개투 총파업은 주관적 의지와 주체적 노력뿐만 아니라 객관적 위기와 모순의 집중, 대중적 분노의 결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관주의적 의지만으로 대중적 총파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객관적 모순과 위기가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위력적 총파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낡은 지배방식으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한 지배계급이 새로운 통제방식으로의 전환을 기도하다가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오히려 더욱 낡은 방식을 강화하는 법개악을 기도하였고 이는 오히려 더욱 큰 노동운동의 저항- 전국적 정치총파업-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총파업투쟁은 사실 87년 이후 10년간 지속된 노동법개정투쟁의 총결산으로 가능했다. 당시의 노사관계는 더 이상의 억압적 병영적 탄압으로 민주노조진영을 배제할 수 없었으며, 한편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88년 11월 제1차 전국노동자대회를 시발로 민주노조 진영의 요구가 노동법개정투쟁으로 모아지고, 이후 10년간에 걸친 투쟁이 전개되었다. 전노협, 업종회의, 그룹별 노조들의 연대체로서 1993년 ILO공대위가 건설되고,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민주노총준비위를 거쳐 민주노총 건설(1995년)에 이르기까지 전체 민주노조진영의 요구는 민주노조진영을 탄압하고 배제하는 복수노조 금지, 제3자개입 금지, 공무원·교사 단결권 금지 등 소위 3금지법을 폐지하고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는 노동3권 쟁취투쟁으로 모아졌다. 민주노총의 출범은 그 동안 전개되어왔던 노동법개정투쟁이 분산, 연대의 느슨한 틀이 아니라 이를 집결하고 총력투쟁할 수 있는 노동자의 무기, 총연합단체가 결성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이로서 단일한 대오가 형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정권은 87년 이후 성장해오던 민주노조운동에 대해 89년 초 3당 합당 보수대연합을 통해 여소야대 국면을 일거에 변화시키고, 전노협 출범에 대해 총체적 탄압에 몰두하였다. 전노협 가입사업장에 대한 업무조사권 발동, 노조연대활동에 대한 제3자 개입금지 조항 적용, 파업에 대한 업무방해 등 형법 처벌, 전교조 출범에 대한 1만 명에 달하는 해직교사 양산 등으로 수많은 열사와 구속자를 양산하고 노동배제적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마저도 효과가 없자 노-경총 합의 등을 통한 기만적 합의주의 정책으로 일관했지만 오히려 기만적 노경총 합의 분쇄투쟁으로 오히려 민주노조진영을 더욱 확대시켜는 결과를 낳았다. OECD 가입에 따른 국제적 압력과 노동법을 국제적 수준에 맞게 개정하겠다는 약속까지 겹쳐 정권으로서는 더 이상 민주노조진영을 배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 이러한 분위기에 더해 현장의 노동자투쟁에 직면한 자본은 신경영전략과 더불어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분위기였다. 강력한 노동자대중투쟁에 직면한 자본은 팀제, 소사장제, SIGMA6, 기업문화정책 등 다양한 신경영전략을 통해 자본의 현장통제를 다시금 되찾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유연화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정리해고제 도입, 근로자파견제 도입, 변형근로제 도입 등 새로운 노동시장 유연화 제도를 요구하는 자본의 요구는 기존의 근기법 체계로 담아낼 수 없었다. 정권 차원에서는 이러한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개정-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유연화 요구를 집단적으로 교환하고 일본, 또는 미국식 노사관계를 도입하고자 한 것이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통한 노동법 개정 국면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개위 국면은 기존의 배제적 일방적 노사관계를 개편하면서도 여전히 노동자 입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유연화를 결합하는 구도로의 개편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다. 


   정권내 온건파의 이러한 의도는 그러나 노개위에서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정부로 넘어가고 난 후에는 경제부처가 노동법개정내용을 주도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재벌중심의 개악안이 노골화되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 다음 날 새벽에 강행된 날치기 노동법은 그야말로 재벌들이 요구하는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에 더해서 집단적 노사관계법조차 일방적으로 개악하는 최악의 날치기였다. 낡은 방식의 통제가 불가능해서 새로운 노사관계법 개정이 요구되었는데 오히려 더욱 일방적으로 재벌들이 요구하는 법개악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정리해고, 변형근로제뿐만 아니라 복수노조 유예, 교섭창구 단일화,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공익사업장 확대, 교사공무원 단결권 유보 등등 자본편향적 개악안이 그 핵심내용으로 포함되었다. 
   
  그러나 10년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성장과 민주노총으로의 결집은 오히려 이러한 반동적 개악날치기가 총파업투쟁이라는 역풍을 맞게 만들었다. 개악된 날치기법은 노동대중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갖게 만들었다. 복수노조의 유예로 인한 민주노조운동의 불법화뿐만 아니라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의 도입이 그렇지 않아도 삼미특수강, 한보사태 등으로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일반 노동자에게 고용불안을 피부에 느끼게 만들었으며,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을 지키기 위해서도 개악노동법의 전면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투쟁에 전면적으로 결합하였다. 노조간부들에게는 노동기본권이 중요했다면, 일반 노동자에게는 정리해고제가 더욱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시민단체나 야당 등에서는 안기부법의 일방강행은 정권이 보다 반동적 반민주적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이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을 총파업투쟁으로 주도하는 민주노총에 전면적으로 결합하게 만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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